[73주년 국군의날①] 1987년 대통령선거, 육사에서 어떤 일이?
오는 10월 1일은 제73회 국군의 날입니다. 한국군이 청장년기를 지나 노년의 나이에 접어들었습니다. 박정희 이후 전두환·노태우 등 군출신 대통령 30년과 이후 김영삼 이후 민간출신 대통령 30년, 군을 빼놓고는 한국 현대사를 얘기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아시아엔>은 국군의 날을 맞아 누구보다 군 시절 열정을 쏟고 여전히 애정과 신뢰를 보내는 분들의 고언과 조언, 격려와 질책을 전합니다. 군문을 떠난 지 20~30년 된 70대, 80대 노병들에 젊은 군에 이르기까지 군 선후배들과 소통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 군의 내일을 함께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필진 가운데는 현역시절 군문제에 대해 대척점의 위치에 있던 분들도 있습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과 맥아더 장군의 말을 되새겨보는 오늘입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편집자>
[아시아엔=최승우 육사생도대장·17사단장 역임, 전 예산군수] 1986년 6월 육사 생도대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육사 생도대장은 학과 과목을 가르치는 교수부의 교육활동과 학과 성적관리 등을 제외한 생도들 일상생활과 훈육 전반에 걸친 모든 활동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생도대장은 육사의 교육목표인 “사관생도로 하여금 장차 육군의 정예장교로서의 임무수행과 지속적 발전에 요구되는 지적 능력, 고결한 품성, 강인한 정신력, 자유민주주의 정신에 기초한 확고한 국가관 함양에 대한 막중한 책임을 지닌” 직책으로 학교장을 제외한 육사 최고의 지휘관인 셈이다.
나는 생도대장으로 부임하면서 1년 반 이후에 있을 예정인 대통령 선거에 대한 개념정립을 이미 확고히 하고 있었다. 이곳 육사생도들에게 멋있는 선거를 치르게 하고픈 마음에서였다. 그래서 훈육책임 장교들에게는 선거에 대한 나의 신념을 분명히 밝혔다. 이런 얘기였다.
“과거 선거 때가 되면 이를 명분 삼아 교육을 하곤 했다. 하지만 청년 군인들에게는 내심 크나큰 실망 내지 마음의 상처까지 주었던 일들이 많았다. 나는 이러한 과오를 이곳 생도대에서만큼은 절대 되풀이 하지 않을 것이다. 선거에 관한 한 내가 모든 책임을 질 테니 앞으로 훈육관을 비롯한 생도대 근무 장교들은 선거의 ‘선’ 자도 생각하거나 얘기하지 말고 오직 기본임무에만 전념하기 바란다. 왜냐하면 존경받는 훈육관이 아무리 차원 높게 선거에 관한 문제를 얘기를 한다 해도 그 순간부터 순수한 생도들에게는 훈육관에 대한 실망감으로 존경과 신뢰는 떨어지게 된다. 나는 신뢰와 존경을 받아야 할 훈육관들을 그런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싶지 않다.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생도들에게 실망과 마음의 상처를 준다면 그동안 우리가 생도교육 전반에 걸쳐 모든 일을 완벽하게 잘했어도 그 한 가지 사실로 그간 이룩했던 모든 성과는 한 순간에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장차 대통령 선거문제를 교육성과의 사활이 걸린 중요한 과제로 보고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
선거 약 3개월 전인 1987년 9월경, 이번에는 생도대 장교들과 생도들에게 공개적으로 밝혔다.
“앞으로 대통령 선거는 군의 통수권자를 결정하는 중요한 행사인데 우리는 진정 고민해서 선택해야만 한다. 나는 육군 준장의 계급과 생도대장이라는 직책을 걸고 어느 누구도 여러분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간섭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 후 선거에 임박해서 전 생도를 대상으로 선거에 관련 분명한 나의 생각을 1200여 생도들에게 직접 다음 세가지 사항을 밝혔다.
1. “생도들은 각종 신문을 읽어라. 그 속에서 올바른 답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노태우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4명의 후보들에 대한 상세한 자료들이 모두 있으니 올바른 선택을 위해서 매일 매일 신문을 열심히 읽어라.”
1986년 6월 생도대장 부임 때 1학년 생도들에게는 신문구독이 금지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던 나는 1학년일수록 신문을 읽어야 한다며 1학년 생도들의 신문 구독을 당장 허용했다. 각종 신문을 모두 중대 홀에 비치했다.
2. “관훈토론, 각종 심야토론의 녹화 자료들은 가장 객관성이 있다. 그리고 4명의 후보들이 난도질당하는 모습이 담겨진 자료로서 그 어떤 자료보다 올바른 판단에 좋은 참고가 될 것으로 본다. 각 중대 홀에 항상 볼 수 있게 조치했으니 생도들은 본인이 선택한 시간에 자유롭게 청취토록 하라.”
3. “이 자리에서 분명히 얘기하는데 선거에 관한 한 어느 누구도 여러분의 기본권을 침해할 수 없다. 나는 장군계급과 생도대장의 직책을 걸고 이를 확실히 지켜줄 것이다. 선거 후에 여러분이 가족, 친지 그리고 친구들을 만날 텐데 그때 무엇보다 떳떳할 수 있어야만 한다. 누가 ‘야, 너희들 어용 투표했지?’ 했을 때 양심의 가책 없이 ‘웃기는 소리 말아라’ 하고 몇 마디 충고까지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여러분의 명예와 자존심이 지켜지는 것이다. 그 대신에 여러분들은 진정 고민하는 자세로 ‘대통령 선택의 사명의식’을 견지해야만 한다.”
그와 동시에 군에서 내려오는 각종 홍보자료들은 일체 덮어버렸다. 물론 좋은 자료들도 있었다. 그러나 위의 3가지 자료보다 나은 것은 없다고 보았다.
당시 나의 상관인 육사교장은 내게 생도들 정신훈화를 하라고 누차 지시했다. 한마디로 여당 출신의 노태우 후보를 선택하는 교육을 차원 높게 하라는 요구였다. 그런 요구나 지시에 내가 응할 까닭이 아무 것도 없었다. 교장은 무척 기분 상했을 것이다.
뒷날 학교 내에서 “생도대장이 선거 문제는 풀기 무척 어려울 것으로 여겼는데 상상외로 멋있게 해결해 생도들이 보람과 긍지를 느꼈다”는 말이 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데 육사 생도들에서 노태우 후보가 무척 앞선 결과로 나타났다. 일부 교관들 사이에선 생도들 지지투표 결과는 어떤 상징성이 있는데 노태우 후보 지지율이 저조했으면 생도대장 신상에 큰 영향이 있을 것으로 염려했다는 얘기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선거는 내 군생활 기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다. 생도대장이었던 나와 생도대 장교들 그리고 생도들 모두의 아름답고 보람 있는 기억이 아닌가 한다. 당시 생도들 중 현역에 남은 후배들은 군단장과 사단장급 장군 또는 병과별로 최고 계급으로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내년 3월엔 대통령 선거, 6월엔 지방선거가 치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