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주년 국군의날⑥] 10월유신 반대 육사 출신 소대장 그후?

10월유신을 전하는 당시 동아일보 1면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1972년 10월 유신을 위한 국민투표가 있었다. 소위였던 나는 부표를 던졌다. 대대장이던 육사 14기 정회경 중령은 나를 불러 씨익 웃으면서 “군인들 봉급 올려준다니 좋잖아” 한마디만 했다. 자신은 못하지만 막 임관한 소위가 거부 표시를 한 것을 대견해 하는 눈치였다.

담당 보안부대원도 “김 소위님 표는 뺐습니다” 한마디만 했다. 고려대 다니다 군에 온 병사였다. 작전과 선임장교는 “김 소위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어”라고 했다. 경기고 출신에 서울대 사회사업학과를 다니다 온 학군장교였다.

소위 임관 후 육사 29기 4학년 생도가 교장 훈화 중 “10월유신은 민주주의 기본에 어긋나지 않으냐”고 항의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교장 최우근 장군은 그를 특별히 질책하지 않고 국가가 위기상황이라는 것만 강조했다고 한다.

4학년 중대장 생도 시절 생도들에 훈시하며 “국회가 소화 말기 일본의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 같이 구성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별 뜻은 있는 게 아니고 정치학 교반에서 읽은 일본 근세사에서 보았기에 아는 체를 한 것이다. 육사에는 ‘비교사회과학’이라고 하여 공산주의 비판이라는 과목이 있다.

유물사관, 변증법적 유물론, 노동가치론, 잉여가치론, 영구혁명론, 독재론 등을 배웠다. 뒤에 명저 <레닌에서 흐루시쵸프>를 보니 다 정리되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아들 지만을 육사에 보냈다. 교장 정승화 장군이 지만 생도를 담당하게 될 훈육관 임형주 소령을 불러 새벽에 2초소에 나가보라고 했다. 박 대통령이 경호원 한명과 같이 나와 지만을 전송하러 왔는데 내무생활 잘 하라고만 하고 훈육관에 인계했다. 아들을 군문에 보내는 아버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육사는 정치 무풍지대였다. 1970년대 들어 3선개헌 반대, 10월유신, 긴급조치 등으로 어수선했지만 육사는 바람을 타지 않았다. 생도들은 일주일에 한번 근처의 서울공대로 구보를 했다. 생도들의 위치를 알고 있는 그들은 시위에 합류하라고 요청하지도 안 했다. 육사는 서울공대에서 개최하는 계산척 대회에 나가서 여러 번 우승했다. 이공 과목이 많은 육사생도는 계산척 쓰는 데 능숙했기 때문이다.

5공시절 국보위에 참여한 교수들은 밴더빌트, 퍼듀, 일리노이주립대, 오하이오주립대, 하와이대 등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들이었다. 하버드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은 교수도 있다. 육사출신은 다양하다.

내가 속한 28기만 해도 졸업 후 육사 교수요원, 육군본부 정책요원, 국방부 정책요원 등으로 박사를 받은 인원이 28명에 달했다. 직업이 장관으로 불렸던 오명 박사는 대표적이다. 김재창 장군은 육사졸업 후 서울대 전기공학과에서 수학하고 교관을 하다가 야전에 나갔다. 그는 한미연합사부사령관으로 대장을 달고 예편 후 미국에서 정치학 박사를 받았다. 고 이병태 장관도 장관을 마치고 정치학 박사를 했다.

조남국 박사는 독일 사관학교를 나오고 귀국해서 전방 근무 후 괴팅겐대학에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땄다. 부인이 독일 여자였는데 장인이 마지노선을 무너뜨린 만슈타인 원수의 휘하에 있었는데 독소전쟁에서 소련군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난 일반 참모장교였다. 조남국 박사는 독일군 전통과 교육에 대해 지인들에 자세히 알려 주었다. 이런 것들은 매우 드문 이야기에 속한다. 하여 필자 혼자 독점하기보다 여러 선후배와 동료 그리고 민간인들과 공유하기 위해 <아시아엔>에 기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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