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73주년] 해방후 소련 강제억류 포로문제 왜 침묵하나?
[아시아엔=문용식 ‘2차대전 후 옛소련 억류피해자’ 유족] 1945년 5월 베를린이 함락되고 독일은 연합국에 항복했다. 일본의 처지도 본토가 공습받아 제국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8월 9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나의 아버지(1924~1974, 文順南)는 만주에서 일본이 8월 15일 항복선언을 한 이튿날 소련군에 포로가 되었다. 아버지의 한 많은 역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해방을 불과 두달 앞둔 1945년 6월 일본군에 징집되어 소련에서 3년 반이나 포로생활을 해야 했다. 1949년 3월 천신만고 끝에 집으로 돌아왔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아버지는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고향을 떠나 김포공항 인근 송정리(현재 서울 강서구 송정동)로 피난 와 터전을 잡고 여생을 살았다. 생전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만 했는데 휴전선 경계가 확정되자 임진강 건너 고향에는 영원히 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나의 아버지는 일본제국주의 군대에 끌려갔다 해방된 조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국제법을 무시한 소련에 포로가 됐다. 아버지는 카자흐스탄 99수용소에 갇힌 채 강제노동에 혹사당했다. 일본군에 포함된 조선출신 포로들은 1948년 10월부터 극동 380수용소에 집결해 2300명이 화물선을 타고 흥남 부두에 도착했다. 냉전은 조국을 남?북으로 갈라놓고 서울과 평양을 수도로 하여 2개의 정부가 수립돼 있었다.
이듬해 2월 남한출신 500명은 열차로 접경지역에 도착, 국경을 넘는 과정에서 총격을 받아 죽거나 많은 사람이 다쳤다. 대부분은 잡혀 경찰서로 압송되고 그곳에 있는 동안 발가벗겨진 채 조사를 받고 폭행도 당했다. 인천 송현동 수용소로 이송돼 한?미 방첩부대와 경찰에서 심문을 받고 3월 26일 마침내 귀가 조치됐다. 집을 떠나 3년 10개월만에 고향에 돌아온 것이다. 죽었다고 했던 아버지가 나타나자 마을에선 난리가 났다. 그동안 자신의 처지를 알릴 방법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전쟁 때는 고향을 떠나 경기도 김포로 단신 피난을 했던 아버지는 만 서른살이 되던 1954년 입대해 4년을 복무하고 1사단에서 전역했다. 20대 초반엔 일제의 군대에, 30대가 되어선 갈라진 조국의 군대에 입대한 것이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제대 후 아버지는 입대 전 살던 곳으로 돌아왔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지주에게 고용된 농사일과, 막노동뿐이었다.
아버지는 원거리를 이동하려면 경찰서에서 허가를 받아야 했다. 소련에 강제 억류됐던 까닭에 사상을 의심받은 것이다. 아버지는 전역 후 어머니를 만나 10평 정도 초가집에서 신혼살림을 했다. 나는 이곳에서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막내 동생은 5살 때 물가에서 익사했다. 어머니 통곡 속에 아버지는 자식을 가마니에 둘둘 말아 캄캄한 밤 지게에 지고 어딘가에 묻고 왔다.
그후 몇 년이 흐른 1974년 봄 아버지는 한 많은 삶을 마감하셨다. 경찰이 와서 이것저것 묻고 갔다. 마을에 초상은 늘 있는 일이지만 병사로 사망한 상가에 경찰이 다녀가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때는 그러려니 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동대문시장에서 생활용품을 사다 마을을 다니며 행상을 했다. 나는 중학 1학년을 마치고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이어 용산경찰서에서 후원하는 직업소년학교를 다니며 검정고시에 합격, 공고를 졸업했다. 아이들이 커 가면서 할아버지에 대해 종종 물어왔다. 하지만 나도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이 짧아 알려줄 게 없었다. 미안한 마음에 언젠가는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일제 피해자들이 제기했던 ‘한일협정 문서공개 청구소송’에 대해 법원이 피해자 손을 들어주자 외교부는 2005년 1월 청구권 문서 5권을 공개했다. 극히 일부를 공개했지만, 졸속체결한 협정에 대한 비판여론이 들끓었다. 이에 국회는 특별법을 제정하고 피해접수를 받기 시작했다. 나도 접수를 하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세상에 안 계시고 남겨놓은 기록도 하나 없었다. 2005년 여름 무작정 동아일보사 본사를 찾아갔다. 마이크로 필름을 돌려 기사를 검색해보니 관련기사가 여럿 있었다.
기사에는 아버지에 대해 북한에서 보낸 공작원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또 인천수용소에서 조사받고 있다는 기사도 있었다. 나는 기사를 근거로 경찰청 등에 아버지의 자취를 탐문하고 찾으려 했다. 하지만 어디서도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담당자는 고문서라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되었거나 자체 폐기되었을 거라 하였다. 국가기록원에도 아버지 기록은 없었다.
국무총리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조사위원회는 광복 50주년이 되던 1995년 ‘소련군에 체포된 조선인’ 관련 신문 특집기사에 실린 명단을 데이터베이스화 하는 과정에서 ‘문순남’이 ‘미나미하라 주난’으로 개명된 것을 확인했다. 신문에 실린 명단에는 ①이름 ②출생 ③출신지 ④부대 ⑤체포일자 ⑥체포장소가 기록되어 있었다. 나는 이를 근거로 일본 후생성에 ‘남평순남’의 군대 이력 및 공탁금 조회를 요청하는 서신을 보내 조회 요청을 했다.
보름쯤 지나 후생성은 ‘남평순남’과 나의 관계를 증명할 한국정부의 서류를 요청하는 회신을 보내왔다. 제적등본과 주민등록등본을 보냈더니 후생노동성 조사계는 “보존된 기록에서 찾을 수 없다”는 회신을 했다. 일본 다른 기관에 제기했던 회신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에서는 찾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가 무너져내렸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심정으로 러시아에서 직접 찾아보기로 했다. 2007년 한국 외교부에 ‘문순남의 노동증명서 발급청원’ 민원을 제기했다. 1년이 지날 즈음 외교부는 “수용지역과 수용소 번호를 알아야 찾을 수 있다. 그것들을 알려달라”고 했다. 너무도 기가 막혔다. 나는 “한국에서 일어난 일도 아니고, 60년 전 소련에서 일어난 일을 내가 어떻게 알아내느냐? 그래서 외교부에 알아달라고 부탁한 것 아니냐?”고 따졌다.
우여곡절 끝에 외교부를 통해 러시아 당국이 보낸 공한원본을 입수할 수 있었다. 또한 국가기록원이 포로명부를 순차적으로 입수하는 계획을 알게 돼 마침내 2009년 4월 비밀이 해제된 아버지에 관한 포로 조사문서 5부를 수령했다. 조사문서에는 신상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여기엔 23살 아버지가 기록한 자필서명이 들어있었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동안 4년이란 시간이 흘러갔다.
나는 청년시절의 아버지를 러시아정부에서 보내온 문서를 통해 온전히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내가 찾고자 애썼던 인천수용소 조사기록을 정부가 몰래 보존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정말 분통이 터졌다. 아버지에게 국가란 무엇이었나? 그리고 나에게 정부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아버지와 내가 후손들에게 물려줄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의 아픔을 보듬어 주고 섬기는 그런 정부라면 더 바랄 게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