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육군 17사단의 ‘낭만을 남기고 떠난 낙엽’

낙엽 쌓인 길 스치는 여심

[아시아엔=최승우 제17보병사단장·육군인사참모부장 역임, 전 예산군수] 33년 세월이 흘렀다. 필자가 사단장으로 재직했던 경기도 부천의 17사단은 100만평 부지로 사령부 영내에 아름드리 거목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경관이 뛰어난 것은 물론이다.

반면에 가을이 되어 낙엽 질 때가 되면 엄청난 양의 낙엽이 쌓인다. 낙엽은 청소를 맡는 후임병의 사정을 안 봐주고 시도 때도 없이 떨어진다. 조그만 나무라면 다 떨어지기 전이라도 미리 흔들어서 떨어버리고, 떨어진 낙엽을 마저 쓸면 되지만 아름드리 수십년생 거목들은 흔들기는커녕 올라갈 수도 없었다. 그러니 청소하고 돌아서면 떨어지고 빗자루 들고 한 바퀴 쓸고 나면 또 떨어진다.

그렇다고 온종일 떨어지는 나뭇잎만 바라보며 계속 지켜 서 있을 수도 없어 이등병 청소당번 고민은 클 수밖에 없다.

그런 중에 고참병으로부터 청소 트집을 잡혀 집합하여 꾸지람을 받거나 불이익 당하는 사례는 필자가 대대장, 연대장 등 지휘관 할 적마다 종종 들어온 바였다.

당시에도 그런 불필요한 요식행위를 대화 지시 설득을 통해서 근절시키는 노력을 했었다. 통상 군에서는 대충 줍기만 해도 될 것을 구태여 무엇을 했다는 것을 일부러 보여주기 위해 꼭 빗자루 자국, 물 뿌린 자국을 남기곤 했다.

나는 청소의 기본개념을 쓸기보다는 줍기에 두었다. “반드시 쓸어야 할 경우라면 쓸어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시간과 노력을 절약하기 위해서 줍는다는 개념으로 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조금 더 나아가서 낙엽에 관해서는 고정관념을 탈피해서 달리 생각해볼 게 있었다. 낙엽을 쓰레기로 생각하지 말자는 것이다. 가을이면 불그스레 또는 노랗게 물드는 아름다운 단풍잎들을 보며 누구나 과거 어느 한때 낭만에 젖어 보았던 경험들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 읽었던 책에서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 김춘수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등 낙엽과 관련된 시와 수필을 많이 접하지 않았나?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밟으면서 거닐 때 들려오는 소리와 함께 시인이 아니라도 많은 감정이 일고 나아가 시심까지도 절로 일게 마련이다. 대부분 경험했듯이 낙엽을 모아 태울 때면 맵고 구수한 향기 같은 냄새가 있고 그 냄새와 함께 어릴 적 옛날 고향집 생각을 하게 된다.

군부대 안에서 경우 낙엽은 청소 후 돌아서기가 무섭게 시도 때도 없이 떨어지기에 아예 나무에 올라가서 흔들어 미리 떨어뜨리는 웃지 못 할 광경도 흔하다.

나는 병사들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낙엽은 쓰레기가 아니다. 무조건 쓸어버리지 말고 즐기는 대상으로 삼자. 수북이 쌓여있는 낙엽을 사뿐사뿐 밟는 재미를 느껴라. 그리고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낙엽을 짓밟아 스트레스를 풀도록 하자.”

그리고 사단장보다 상급자가 방문할 때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기에 그때는 별도 지시할 것이라고 분명히 전달했다. 요컨대 “사단장 이하 우리끼리는 낙엽 청소하느라 부담갖지 말고 맘껏 즐기자”는 요지였다.

낙엽의 계절이다. 아침 저녁 길거리에 나서면 떨어지는 낙엽이 수북이 쌓인다. 그때 그 병사들도 대부분 초로의 나이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그들이 코로나19로 심신이 지친 우리에게 가을이 준 선물, ‘낙엽 낭만’을 만끽하고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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