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돈 칼럼] 6·25 참전용사 어머니여 아내여

당신들께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1950년 6월26일은 미국시각으로 일요일이었다. UN은 그 전날 북한의 전면남침을 불법침략으로 규정하고 즉각 북위 38°선 이북으로 철퇴할 것과 제3국들의 대북한 지원 자제를 요구하는 제1차 결의안을 가결했다. 그 다음날에는 미국의 해·공군이 참전했고 28일에는 UN의 “한국에 군사원조 제공”을 내용으로 하는 제2차 결의안을 가결했다. 그날 영국군이 참전했고 7월1일에는 미국 지상군과 오스트레일리아 해·공군도 참전했다.

남침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빠른 속도로 남진, 한달 만에 한반도 서남해안의 순천을 점령했다. 이에 국군은 대구 북방 낙동강에서 미군과 함께 방어전을 벌이고 있었다. 대한민국 전국토 점령을 코앞에 둔 북한군과 나라를 지키겠다는 굳은 각오로 싸우는 우리 국군 사이 처절한 혈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즈음 다 망해가는 우리나라를 구하겠다는 여러 나라의 군부대들이 속속 도착하여 전선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미국에 이어 영국·터키·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필리핀·뉴질랜드·콜롬비아·태국·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프랑스·그리스·에티오피아·남아프리카공화국 부대가 참전했다. 이들 중 전사자(실종·포로 포함) 5만598명, 부상자 55만명의 막대한 피해가 났다. 이들이 얼마나 용감하게 싸웠는지 잘 말해주고 있다. 전선에 가장 먼저 도착해 교전한 미 제24사단의 경우, 천안 방어전에서 예하 제34연대장 로버트 R. 마틴 대령이 전사했고 대전 방어전에서 사단장 윌리엄 F. 딘 소장이 적에게 포로가 됐다.

지상작전을 총지휘한 제임스 밴프리트 장군의 아들, 밴프리트 2세 공군중위도 전투기 조종사로 출격하여 실종되었고, UN군사령관 마크 클라크 장군의 아들, 마크 빌 클라크 육군대위도 세 번이나 부상당하여 제대한 후 사망했다.

이들 참전 16개국 외에도 병원선이나 야전병원 등을 파견하여 우리를 도와준 나라들도 있다.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이탈리아·인도 5개국이다. 이들의 헌신적인 진료활동은 전선의 장병들과 후방의 국민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인도 의료진은 적의 포격으로 사망 3명, 부상 21명의 피해를 입기도 했다.

정의감이 강하고 용감한 참전용사들 중에는 훗날 그들의 나라에서 명사가 된 사람들, 나아가 세계적인 명사가 된 사람들도 있다.

당시 프랑스군 대대장 랄프 몽클라 중령은 2차대전 당시 육군중장이었다. 그는 중령계급으로 참전, 대대를 지휘하여 대단히 잘 싸웠다. 훗날 그가 제대한 후 고향에서 사망했을 때 당시 대통령 드골이 장례식에 참석한 ‘의전상의 파격’은 세인을 놀라게 했다.

필리핀 참전용사 피델 발데스 라모스는 후에 육군참모총장과 국방장관 역임후 1992년 대통령에 당선되어 6년간 재임했다. 에티오피아의 참전용사 비킬라 아베베는 1960년 로마올림픽과 1964년 도쿄올림픽 마라톤 종목에 연달아 출전해 두 차례 모두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 스포츠 영웅이 됐다.

한국전쟁 때 훌륭한 젊은이들이 목숨을 걸고 참전해 우리를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살아남아 번영을 누리는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를 구해준 은인, 그 고마운 나라, 고마운 사람들에게, 특히 그들의 어머니와 아내들에게 깊이 깊이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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