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N 특종] 6·25전쟁에 일본군 ‘참전’했다

*아시아기자협회와 아시아엔(The AsiaN)이 2013년 6월25일 오프라인매체 <매거진 N>을 창간했습니다. 일본이 세계대전 패전 후 ‘평화헌법’에도 불구하고 6·25 전쟁에 참전했다는 소식을 국내 언론 최초로?매거진 N 창간호의 첫 ‘발굴특종’으로 소개합니다. -아시아엔(The AsiaN)

원산만 소해작전에서 기뢰를 폭발시키는 장면 <사진제공=이종판>

원산·군산·진남포 등 소해작전에 함정 54척, 대원 1450명 동원
패전 후 첫 군사조직 해외파견… ‘평화헌법 위배’ 논란 여지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참전 해군을 6·25전쟁에 파견한 사실이 확인됐다. <매거진N>은 이종판(59, 육사34기) 한국미래문제연구원 연구기획실장의 ‘한국전쟁 당시 일본의 역할 연구’ 박사학위논문(한양대, 2007년)과 일본서적 <조선전쟁에 출동한 일본 특별소해대>(노세 쇼고, 방위연구소사료실, 1978년), <한국전쟁의 특별소해대>(히라마 요이치, 1992년) 등을 통해 이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일본의 한국전 ‘사실상 참전’은 일본과 한국의 극소수 군사(軍史) 전문가들에 의해 연구됐으나 국내언론에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매거진N>은 일본정부가 지난해 군사비밀에서 해제한 소해부대의 한국전 참전상황 문서를 입수해 전문가들과 함께 분석했다.

일본 정부와 일부 학자들은 소해부대 파견 사실을 놓고 “2차대전 후 처음 벌어진 한국전쟁에서 연합군과 함께 한국전에 ‘참전’해 세계평화에 기여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 일각에선 “일본이 17번째 한국전쟁 참전국”이라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일본은 구 해군을 중심으로 소해대(掃海隊)를 편성해 1950년 10월10일부터 12월4일까지 원산·군산·인천·해주·진남포 등지에서 소해작전을 실시했다. 이들 작전에는 연인원 1450명이 동원됐다. 특히 원산상륙작전을 앞둔 일본의 소해작전 성공은 미국의 대일강화조약에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국내언론 최초 일 군사기밀문서 입수

‘소해작전’은 병력 및 장비 등을 태운 아군 함정의 이동을 돕기 위해 적군이 이를 방해하기 위해 바다에 부설한 기뢰를 제거하는 작업을 말한다. 당시 일본은 소해정 44척과 순시선 10척을 동원해 해로 327km, 정박지 607㎢ 일대에서 기뢰 27개를 처리했다. 북한은 6·25전쟁 직후인 8월 초부터 연합군의 상륙작전에 대비해 소련제 기뢰 3000여개를 원산·군산·진남포 등에 부설했다.

이종판 박사는 “인천상륙작전 직후인 1950년 10월2일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은 10월 중순으로 예정된 원산상륙작전에 앞서 원산항에 매설된 기뢰 제거를 위해 오쿠보 야스오(大久保武雄) 일본 해상보안청 장관에게 일본 소해대를 한반도해역에 출동할 것을 요구했다”며 “오쿠보의 보고를 받은 요시다 시게루 (吉田茂) 수상은 미국의 요구를 즉각 수용했다”고 밝혔다. 이 박사는 “당시 일본은 패망 후 군대가 해산된 상태였으나, 한국전에 파견된 사람들은 실제로는 2차대전 전투경험이 풍부한 ‘숙련된’ 군인이었다”고 말했다.

소해작전을 펼친 해상보안청은 일본이 2차대전 후 해외에 파견한 사실상 첫 군사조직이다. 이는 1947년 5월3일자로 시행된 일본의 평화헌법을 정면으로 위배한 것이어서 향후 국제사회에서 논란거리가 될 수도 있다. 일본 평화헌법은 제9조에서 교전권 불가, 전력 보유금지를 명기하고 있다.

6·25전쟁 당시 알레이 버크 미국동해군 참모부장(당시 소장, 예비역 대장)은 1978년 일본 <NHK>와의 인터뷰에서 “원산상륙작전을 위해 (북한군이 부설한) 기뢰를 처리해야 했는데, 미국은 극동전체에 10~12척의 소해정밖에 없어 소해처리가 불가능했다”며 “그래서 소해정 80~90척과 기술이 우수한 소해부대원 1500여명으로 소해대를 편성해 출동할 것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일본 소해대의 한국전 출동은 일본에 주둔한 유엔군사령부(GHQ)의 명령으로 실행됐지만, 일본정부의 ‘자주적인’ 협력으로 이뤄졌다”며 “미국의 참전요구에 요시다 수상은 즉시 동의했다”고 밝혔다.

버크 소장은 1950년 10월2일 오쿠보 해상보안청 장관을 도쿄 극동군 해군사령부로 불러 “2차대전 이후 잔류한 소해정을 대마도해협에 집결시켜 원산만 소해를 지원하고 인천상륙작전에 설치된 기뢰를 뒤처리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오쿠보 장관은 긴급간부회의를 소집해 “미국의 지령에 의해 한반도해역에 소해를 실시하므로 소해선박을 즉시 모지(門司)에 집결하라”는 준비명령을 전국 항로계발부에 발령했고 파견 소해대를 ‘특별소해대’라고 명명했다.

총지휘관에는 다무라 큐조 항로계발본부장이 임명됐고, 10월6일 모선 1척, 소해정 10척, 순시선 4척 등이 시모노세키 가라도에 집결해 지휘함 MS62 ‘유우치도리’함에서 지휘관회의를 열었다. 당시 극동해군사령부 죠이 중장이 일본 운수성 장관에게 지시한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연합군최고사령관은 일본 소해정 20척, 시항선 1척, 순시선 4척을 한반도해역에서 사용토록 승인하며 극동해군사령부 지령에 따라 일본정부는 모지에 집결한 선박에 명령을 내린다. 2. 한반도해역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선박은 일장기 대신 국제신호기 ‘E’의 변형기(연꼬리형)를 게양한다. 3. 본 임무를 수행하는 자는 2배의 급여를 지급하며 한반도해역에서 후방지원은 미 해군이 담당한다.

1개 소해대는 4~6척씩으로 편성됐으며 지휘관에는 관구별 항로계발본부장이 임명됐다. 일본의 제1, 제2소해대는 미 제7통합임무부대 스트라블 중장 지휘 아래 제95.6소해 호위임무부대군 TE95.96에 편입돼 미군의 특별소해 제1호 명령에 따라 작전에 돌입했다.

1950년 10월26일 원산으로 돌진하는 유엔군 상륙정들. 인천상륙작전에 이은 원산항 확보로 연합군과 국군은 수세에서 공세로 돌아섰다. <사진제공=박도>

소해부대, 해상자위대 창설의 주축

미군은 애초 일본의 제1소해대를 인천, 제2소해대를 원산으로 각각 출동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제2소해대는 10월10일 원산에 도착해 작전을 펼치다 10월17일 기뢰 접촉사고로 나카다니사카 다로가 사망하고 22명이 부상하는 사고를 당했다. 이에 다무라 총지휘관과 노세 제2소해대 지휘관은 시모노세키로 귀항했다. 일본정부는 당시 숨진 나카다니사카에게 1979년 훈장을 추서했다. 나카다니사카의 묘는 시코쿠에 있으며, 기념비에 요시다 수상의 휘호가 적혀 있다.

이 사고 후 10월24일 오쿠보 장관은 현지 소해부대에 “여러분의 임무는 일본정부가 알고 있으며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특별임무에 대해 급여가 지급되도록 일본과 GHQ간 양해가 돼 있다”고 소해임무를 독려했다.

오쿠보 장관은 1950년 10월31일 오카자키 관방장관을 방문했다. 오카자키는 이 자리에서 “일본정부로서는 유엔군에 전면적으로 협력하고, 이에 따라 강화조약을 일본에게 유리하게 이끌어갈 생각이다. 추운 겨울 한반도해역에서 노후화한 작은 배로 소해작업에 대단히 노고가 많을 것으로 생각되나 최선을 다해 미 해군의 요망에 부응하길 바란다”는 요시다 수상의 메시지를 전했다.

당시는 9월14일 대일강화조약 예비회담 개최와 관련한 트루먼 대통령의 성명 발표에 이어 미국과 일본 간 대일강화조약 초안이 검토되던 때였다. 11월1일 발표된 ‘대일강화 7원칙’은 패전국 일본에 매우 유리하게 돼있다. 이와 관련해 버크 소장은 당시 오쿠보 장관에게 “일본의 해상보안청 소해대가 한반도에서 유엔군을 도왔던 것은 국제적으로 큰 의의가 있다”고 밝혔다.

이종판 박사는 “일본이 한국전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은 요시다 수상이 강화조약을 유리하게 이끌어내기 위한 의도와 유엔군의 필요가 맞아떨어진 결과”라며 “특히 패전 후 해상보안청에서 없어졌어야 할 해군 소해대가 한국전쟁 참전 후 곧 이어 창설된 해상자위대의 중핵이 됐다”고 말했다.

미군이 작성한 원산만 일대 소해작전도. 1950년 10월10일~11월2일이라 작전시기가 명시돼 있다.

미 태평양함대사령관이 작성한 ‘한국전쟁에 관한 중간평가보고서’(극비문서)는 “일본소해정은 신뢰할 만했다. 작업과정에서 언어문제가 있었으나 기후와 후방지원의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계유(係維) 및 자기(磁氣)기뢰를 소해했다. 인력은 우수(good)했으며, 작업성과도 양호했다(satisfactory)”고 기록했다.

한편 미국정부 및 군당국이 일제히 반대하고 맥아더 사령관 자신도 매우 회의적이었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던 요인은GHQ에 근무하던 일본군 출신 참모들의 건의가 주효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지난해 말 87세로 숨진 옛 일본육사 출신으로 2011년까지 자위대간부학교에서 교수를 지낸 미키 히데요 장군은 “맥아더 사령관이 ‘인천을 기습 상륙하면 서울에 진주한 북한군을 격퇴할 수 있다’는 과거 조선 주둔 사령관 출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상륙작전을 감행했으며, 이로써 성공에 이를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고 이 박사는 전했다. 미키 자신도 인천상륙작전과 관련해 맥아더에게 조언했으며, 일본 내 6.25전쟁 최고전문가로 꼽혀왔다.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낸 민병돈 예비역 중장(육사 15기)은 “한국전사에는 공식 기록되지 않았지만, 맥아더가 반일감정이 강했던 이승만 대통령 모르게 일본군을 동원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일본의 평화헌법을 위반하고 주권국가의 의사에 반해 동원했다면 국제적 논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은 소해작전 외 상당한 규모의 종군간호부와 물자수송 지원인력 등도 한국전에 파견했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