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돈 장군 “6·25와 월남전 ‘같은 날짜’ 총격, 그날은 외출도 삼가”
<민병돈 장군의 6·25 참전기>??
25일 아시아기자협회(회장 이반림)와 아시아엔(The AsiaN, 발행인 이상기)이 주최한 이토료지 NHK?서울지국장의 환송식에 민병돈(77·육사15기) 전 육사교장(예비역 중장)이 참석했다.?민 장군은 육사교장 시절 노태우 대통령의 유화적인 대북정책을 면전에서 비판하면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전역하면서 후배와 동료에게 군복만 안 입은 군인으로 살겠다고 약속한 뒤 기업이나 정치권에서 자리를 주겠다는 요청도 모두 거절하고 연금으로만 생활해 온 강직한 군인으로 알려졌다.
휘문중학교 3학년 때 6·25가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입대, 백선엽 장군이 이끌던 1사단 15연대 소속으로 전투에 참가했다. 6개월 동안 학도병으로 참가했다가 복학해 고교 과정을 마치고 훗날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970년 월남전에 9사단 28연대 작전 주임(소령)으로 전투에 참가했다. 이후 특전여단장, 20사단장, 육군정보참모부장, 특전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6월25일을 맞아 민 장군으로부터 6·25 참전기를 들었다.
6·25와 베트남전서 ‘같은 날짜’ 총격 당해…이후 3월15일은?밖에 안 나가???
“현재 서울?안국동 현대건설 본사가?위치한 곳이 옛 제 모교인 휘문중학교가 있던 자리입니다. 6·25 동란 이전 이미 한성중학교가 좌경화돼 있었고 휘문중학교가 그 다음이었습니다. 사립중학교 선생님들이 대체로 그랬죠.
일요일 전쟁이 난 후 월요일 학교에 갔더니 상급생이 김일성 찬양 노래를 가르치고 인민군에 나가라고 하더군요. 당시 의용군이었죠. 며칠 후 상급생들이 나와 동기들을 빙 둘러싸고 눈을 감으라고 하더군요. “인민군이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 자진해서 입대할 후배들이 없나?” 그러면서 누구누구는 인민군에 들어간다고 손을 들었다며 모두 손을 들도록 유도하더군요. 손을 들 수밖에 없었죠. 그 자리에서 바로 청계초등학교로 이동해 기초훈련을 받은?후 인민군 부대로 배속시켰어요.
그때 저를 아끼던 국어선생님이, 이 분도 빨갱이였지만 당시 제대로 된 빨갱이는 없었죠, 저에게 심부름을 시키며 저를 빼주셨어요. 당시 인민군 부대에 들어가 아직도 소식 없는 친구들이 있어요.
사실 오늘 군대 동기들과 저녁을 하는 날이에요. 그런데 이 행사가 있어서 어제 했어요. 당시 부대원 중 살아있는 사람이 네 명 있어요. 명복을 빌었죠. 당시 한 부대원이 많으면 12명 적으면 9명인데, 전쟁 중 죽고 늙어서 죽고 남은 사람이 네 명입니다.
솔직히 국가를 위해 돌격? 아니에요. 전쟁에 투입되면 분대장이 무서워 싸우지 국가에 충성하기 위해 싸우지 않아요. 부모님 생각도 안 나는데요. 안 싸우면 분대장이 쏘니까. 6·25때 정일권 참모총장이 분대장에게까지 즉결처분권을 줬어요. 명령에 따르지 않고 이탈하면 재판 없이?쏴도 된다는 거죠.
즉결처분권이 없었으면 우리나라가 무너졌을 거예요. 나가 싸우지 않으면 분대장이 쏘니까 물불 안 가리고 싸우는 거죠. 그 훈령이 1년 갔어요. 1951년 6월까지. 솔직히 분대장도 뭘 알아요? 소위 무식한 사람들이 나라를 지켰죠. 농사짓다 온 순진한 청년들이 지킨 거죠. 서울 엘리트 집안의 아이들은 다 도망갔어요. 전쟁 상황을 글로 쓴 사람들은 사실 뒤에서 지켜본 자들이죠. 총알이 오가는 전장의 한복판에 있던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전쟁을 잘 인식할 수 있겠어요.
총알이 빗발치는 곳에서 몇 번 운 좋게 살아나면서 ‘총알이 사람을 피하는 것’이라고 배웠어요. 그래야 용감히 싸우니까요. 인민군에게 포로로 잡혀 탈출을 감행하다가 인민군의 총탄이 어깨 아랫부분을 관통하는 전상을 입었어요. 치료를 받은?이후로는 겁도 나고 슬슬 뒤꽁무니만 쫓아다니게 되더군요. 영화에서 용감하게 뛰어다니고 그런 장면 나오잖아요? 다 거짓말이에요. 건강한 사람 중에도 등산할 때 뛰어 올라가는 사람이 몇 명이나 돼요? 설사 뛴다고 해도 많이 못 가죠. 게다가 철모, 총, 배낭까지 메고 뛴다는 것은…. 뛰어서 올라가 봤자 한 20미터?
분대장의 즉결처분권 무서워?물불 안가리고 싸워
전장에 나간 군인들은 지휘자의 명에 의해 움직이죠. 한번은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고 도망가는데, 뒤에서 지원사격을 해주더군요. 정월 초하루로 기억됩니다만. 그런데 알고 봤더니 적군이었어요. 적이 등 뒤에서 쏘는 거였죠. 오금이 저리다는 것을 실감했어요.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어떻게 포위망을 뚫고 나왔는지 기억도 안 납니다. 당시 뭐 전술이란 게 있었겠어요? 상관이라고 해봤자 일제시대에 잠깐 싸웠던 사람들인데, 상황이 많이 다르죠. 각자 살아남으면 우연히 다시 만나고.
총알을 맞은 날이 3월15일이에요. 월남전에도 참전했는데, 거기서도 총알을 맞을 뻔 한 날이 3월15일이에요. 상관한테는 경례하지 말라는 것을 잊고 부하가 경례하는 바람에 내 신분이 탄로 나 저격을 당했죠.?당시에 텐트에 쉬러 들어갔는데 눕지 않았다면 가슴에 바로 맞았을 거에요. 이후로는 3월15일에는 집 밖에도 안 나갑니다.
5공화국 때 서울근교의 사단장을 했죠. 당시 민병돈은?대통령 말도 안 듣는 군인으로 알려졌어요. 총선거 때 정훈교육을 통해 여당에 표를 찍으라고 지시가 내려왔지만 저는 그 말을 안 들었어요. 부하들에게 학교에서 배운 대로 투표하라고 했어요. 그런 이유로 좌천도 당했죠.
1987년 특전사령관을 맡았을 때 일입니다. 특전사령관은 쿠데타를 일으키거나, 쿠데타를 진압하는데 가장 선봉이 되는 부대입니다.?노태우 정권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계엄령을 선포한다는 둥 한창 시끄러울 때였는데, 중심을 잡고 정치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중립을 지켰습니다.
노태우 정권 시절 육사교장을 맡았는데, 노태우 전 대통령이 북한과 동반자 관계를 천명하면서 주적관계가 불분명해졌어요. 군대는 적이 있어야 하는데, 전방에서 혼란이 클 것 같았어요. 이에 대한 논란이 분분했어요. 누군가 제대로 된 해석을 내놔야 하는데 다들 피해요. 그 화살이 결국 학교선생님, 그중에서도 교장에게 오죠.
육사 졸업식 때 대통령 부부가 참석했어요. 노 대통령 부부가 우리 부부 옆에 앉았는데 대통령의 대북 유화정책을 바로 비판했어요.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기사로 나를 죽일 놈을 만드는데…. 물론 이후 국방부 기자들이 새롭게 조명해 주면서 그것으로 영웅이 되기도 했지만. 이후 제가 그만뒀어요. 나가라고 해서 그만둔?게 아닙니다.
어제 살아남은 부대 동기들과 한잔하면서 이런 건배사를 했어요. “우리 좀 더 살자”고요. 우리 좀 더 삽시다.”
김남주 기자 david9303@theasian.a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