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특별기고] 10살 어린 눈으로 맞이한 8·15 광복의 순간
우리 민족이 8·15 광복을 맞이한 지 어느덧 70년이 흘렀다. 그 세월동안 우리는 소위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놀라운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룩하며 발전을 거듭했다. 우리 근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변혁들을 목도한 민병돈 <아시아엔> 대기자가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10살 어린 눈으로 맞이한 ‘광복의 순간’을 글에 담았다. -편집자
[아시아엔=민병돈 전 육사교장, <아시아엔> 대기자] 국민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 나는 아침 밥을 먹고 밖에 나가 아이들과 놀다가 한 아이의 말을 들었다. 미국과 전쟁 중이던 일본이 항복했다는 얘기였다. 그 아이는 아침에 라디오 방송을 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그 사실을 알았다고 했다. 일본 천황의 ‘항복방송’이 8월15일(1945년) 정오에 있었다고 하니까 내가 일본의 항복소식을 들은 그날은 8월16일이었을 것이다.
하루 이틀 지나면서 여기저기 큰 건물에 내 걸린 깃발들이 눈에 띄었다. 눈에 익은 일장기가 아닌, 처음 보는 깃발들이었다. 큰 건물이라고 해야 지금과 같은 빌딩은 없었고 가장 높은 것이 몇몇 백화점으로 5~6층 정도였다. 그때 대다수 ‘조선사람들’은 처음으로 태극기를 보게 된 것이다. 볼품없이 단순한 일장기보다 훨씬 아름다워 보였다.
해마다 8월15일이 되면 광복절이라고 해서 TV방송은,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몰려나와 환호하는 군중의 모습을 방영한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광경은 8월15일에는 없었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매스 미디어가 발달하지 못했고,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라디오를 가진 집이 많지 않았다. 더욱이 농촌에는 한 마을에 라디오 있는 집이 한 집 정도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 당시 사람들은 뉴스에 별 관심도 없었고 낮에 남자들이 일하러 나간 동안 집에 있는 대다수 부인네들은 일본말 방송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대부분 조선사람들은 그 다음날에, 농촌 사람들은 그보다도 더 늦게 해방이 됐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
또 그때는 손에 들고 나올 태극기를 가지고 있는 집이 없었다. 일제시대에 금지돼온 태극기를 본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 당시 처음 보게 된 태극기는 일본사람들의 일장기에 파란 색을 덧 씌워 태극을 그려 넣고 4괘를 그려 넣은 것들이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정확하게 그려진 태극기는 못 되고 서로 서로 조금씩 다른 태극기일 수밖에 없었다.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4괘에 있었다. 조금 떨어져서 보면 똑같은 태극기인데 가까이서 보면 4괘가 구구 각각이었다.
개학하여 학교에 가니 일본인 선생님들은 모두 가버렸고 우리말로 수업이 진행됐다. 이전까지는 일본말이 국어였는데 이제는 우리말이 국어가 되었다. 선생님들도 방학 동안에 속성으로 한글공부를 하여 ‘우리말’로 한글을 가르쳤다. 그러한 분들의 한글 맞춤법 실력이야 말할 필요도 없이 뻔한 것이었다.
어색한 것은 그때까지 일본국왕을 ‘천황폐하’라 부르고 허리를 90도로 굽혀 절하며 아동들 앞에서 가르치고 모범을 보이던 분들의 180도 달라진 모습이었다. 이분들은 이른바 ‘대일본제국’이 미국을 상대로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의 일본식 표현)을 시작한 날이 1941년 12월8일인 까닭에 매월 8일이면 어린 학생들을 신궁(神宮)이 있는 남산으로 인솔해 “이 전쟁에 이기게 해 달라”고 일본식으로 기원하며 일본식으로 손뼉치고 허리 굽혀 절하게 하던, 모범적인 제국신민(帝國臣民)의 모습을 연출한 분들이었다. 이들이 하루아침에 태극기가 걸린 학교에서 ‘단군의 자손’, ‘무궁화 삼천리’를 가르치는 모습을 보이자니 몹시 힘들었을 것이다.
질이 좋지도 않은 종이에 한글로 인쇄한 국어교과서를 받아 ‘배달의 자손’이 된 아동들 또한 얼떨떨했다. 우리는 ‘대한사람’이 되어 애국가도 배웠다. 새 나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