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평화헌법, ‘세계유산’ 지정해야
오죽했으면 평화헌법이라 했겠나. 국가의 최고 상위법인 헌법에 ‘평화’라는 접두어를 붙여 ‘평화헌법’이란 별칭을 가진 나라는 세상에 일본뿐일 것이다. 평화헌법이란 말에서 묻어나듯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래 계속돼온 전쟁에 국민들이 얼마나 진절머리가 났는지 알 수 있다. 맥아더 사령부가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헌법 제9조라는 ‘재갈’을 물려도 불평 없을 만큼 일본국민들은 평화를 갈망하고 있었다.
1946년 11월3일 신헌법 공포기념축하대회에서 미야자와 도시요시 도쿄대학 교수는 “이것은 세계에서 제일 가는 헌법이다. 일본은 모든 전쟁을 포기했다. 군인도 총이나 군함을 갖지 못하게 선언했다. 나는 긍지로써 이것을 평화헌법으로 명명하고 싶다”고 외쳤다. 이것이 평화헌법이란 말의 뿌리다. 좀더 깊게 생각하면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항복과 평화헌법은 왕에서 국민으로 주권이 전환되었기에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순수하게 비무장 평화에서 비롯된 일본헌법이 냉전과 6·25전쟁을 계기로 ‘무장평화’로 바뀌면서 헌법은 그대로 존속하고 있었다.
헌법은 이상을 추구하나 현실은 자위대라는 세계 첨단 무장조직임을 국제사회가 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일본헌법에서는 자위대를 군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것이 자위대의 딜레마다. 만약 일본 자위대가 군대로 격상돼 현재 GDP 1%인 방위비를 2%만 사용해도 그 위용은 대단할 것이다. 그나마 평화헌법이 이를 제어하고 있었는데, 아베 정권은 헌법개정에 사활을 걸고 있다.
아베 총리는 올 1월 TV 인터뷰에서 헌법을 개정해야 할 3가지 이유를 설명했다. 첫째 맥아더가 만들어 강제화한 법이고, 둘째 60년 이상 지난 지금 시대에 맞지 않으며, 셋째 일본인이 직접 만든 헌법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미국 점령군이 천황 생일을 택해 A급 전범을 처형했다면서 선동적인 언설을 삼가지 않았다. 제2기 아베 정권 출범 이후 이처럼 헌법개정 분위기가 급속히 일어나는 배경이 무엇일까.
복고주의 ‘세습의원’들이 개헌 주장
원래 자민당은 헌법개정을 목적으로 보수합동으로 탄생한 ‘개헌정당’이다. 메이지시대에 자란 아베의 조부는 기시(岸信) 전 수상(A급 전범 해제자, 1956~1960년 집권)이다. 그가 주동한 ‘자주헌법기성의원동맹’ ‘자주헌법제정국민회의’ 같은 단체 회원들이 개헌을 주도했다. 패전 굴욕의 상징인 헌법을 개정하자는 주도세력은 아베를 정점으로 한 세습 의원들이다. 이들은 메이지시대로 복귀하자는 ‘메이지헌법 향수파’들이다. 그동안 개헌론의 운만 띄워놓고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나, 기시의 손자 아베가 정치일선에 부활하면서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총리에게 묻는다. 평화헌법을 세계의 보물로 존치시켜 일본이 평화애호 모범국가로 남는 것이 훨씬 좋은 일 아니겠는가. 이렇게 당부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전쟁피해자, 특히 한국과 중국의 경우 일본정부의 반성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반성은커녕 독도문제나 종군위안부에 대한 태도 등을 보아 근신이 더 필요하다. 최근에는 태평양전쟁의 정당성을 내세우고 있다. 아베 총리는 TV인터뷰에서 궁지에 몰린 쥐가 도망갈 구멍이 없어 고양이를 공격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맥아더는 유엔군 사령관에서 해임된 뒤 의회청문회(1951년 5월3일)에서 “미국 등 연합국이 경제봉쇄로 일본을 몰아붙이자 빠져나갈 구멍을 찾지 못한 일본이 자위를 명분으로 전쟁에 뛰어들었다”며 일본을 거들었다. 일본은 전후 65년만에 공개된 맥아더의 증언을 침략전쟁 부정의 면죄부로 활용하고 있다.
둘째, 외부위협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일본의 특이한 전쟁관을 고려하면 제어장치로서 제9조 존속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국가는 자국의 유사시 대비를 위한 법제만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주변국의 사태도 일본의 위협으로 여길 정도로 개입의 폭이 크다. 6·25전쟁 당시 일본 총리였던 요시다는 회고록에서 “GHQ점령 아래서는 어쩔 수 없지만 과거의 일본이라면 6·25전쟁에 개입했을 것”이라고 했다. 만약 일본이 독립된 상태였다면 가만있지 않았을 거라는 뜻이다.
패전국 일본 안전핀 제거하나
셋째, 미국의 ‘지일파’ 아미티지 전 국무부 차관이나 나이 교수 등도 개헌을 반대한다. 개헌으로 일본의 독자성이 강화될 경우 결국 미일동맹이 약화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중국도 일본군의 전쟁 ‘곤죠(根性)’에 질릴 정도였다.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은 근접전투를 기피했을 정도로 일본군을 두려워했다. 일본군은 네팔의 그루커 용병과 같이 죽음을 각오하고 덤벼들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마오쩌둥이 6·25전쟁 개입 여부를 두고 궁리하면서 미군은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으나 일본이 재무장해 투입된다면 힘든 상대가 될 것이라고 미군보다 한 수 높게 여길 정도였다.
오늘날 동북아에 패권을 위한 무력충돌 분위기가 익어가고 있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 말기까지 중국 중심의 시스템에서 근대 식민지 시스템으로, 20세기 중반 들어 민족 중심의 주권국가를 기초로 국제관계시스템이 발전했다. 400년 이상 민족국가를 건설해 온 구미제국에 비하면 민족국가 역사가 매우 짧다. 영토문제가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다. 동북아 영토분쟁은 제국주의 유산이다. 영토문제는 민족국가 건설과정에서 특히 민감하기 때문에 국제환경이 성숙할 때까지 계쟁(係爭)을 보류하면서 결자해지 자세를 취해야 한다. 그 중심에 일본이 있다. 이 매듭이 풀릴 때까지 서둘지 말고 평화헌법을 국제사회 평화와 번영의 이정표로 삼기 바란다.
평화헌법은 평화파괴로 인해 값비싼 희생을 치른 일본사회와 역사가 만들어 낸 자산이다. 주변국에게는 일본의 ‘평화브랜드’로 군국주의 이미지를 개선시킬 수 있다.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것도 평화헌법의 영향이 컸음을 부인할 수 없다. 지금 세계의 시선이 평화헌법에 집중되고 있다. 자민당의 헌법 초안대로 폐기되느냐, 아니면 60년 간 평화·번영의 공(?)을 인정해 국제평화의 모델로 존속하느냐 기로에 있다. 자민당안(案)대로라면 전후 일본의 안전핀을 제거하는 꼴이다. 이후 일본정치는 아베류(流)의 복고주의가 힘을 받아 군사 우선주의가 부상하고 주변국과의 갈등이 높아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일본은 인류역사상 최초로 원폭이 투하된 아픈 상처가 아직도 남아있는 현장이다. 이미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히로시마 원폭돔과 함께 평화헌법도 국제평화의 반면교사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