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⑨ ‘5성장군’ 김홍일과 맥아더
군 수뇌부가 작전지휘를 그르친 가운데 각급부대의 의지와 역량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6·25 초기 우리 군의 현실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김종오의 춘천회전과 김홍일의 한강선 방어이다. 김종오의 6사단이 적 2군단의 공격을 48시간 이상 막아냄으로써 한강 남안을 도하, 아군의 주력을 포위하려던 북한군의 작전구상을 근본에서부터 흔들리게 한 것은 실로 큰 전공으로서 오늘날에는 춘천대첩이라고까지 불리운다.
춘천 방면에서의 6사단의 선전과 함께, 김홍일 소장이 지휘한 한강선 방어전투가 또한 결정적이었다. 김홍일은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시 폭탄을 준비한 애국지사이자 중국군에서 소장까지 진급한 군 원로로서 6·25당시 시흥의 육군종합학교장으로 재임중이었다. 김홍일은 6월 27, 28일에 한강을 넘어 패퇴하는 국군장병들을 모아 시흥전투사령부를 편성, 한강방어선을 구축하여 7월 3일까지 적의 도하를 저지함으로써 미지상군이 참전하는데 필요한 귀중한 시간을 벌고 경부축선의 전선을 조정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6월 28일 맥아더가 한강 남단에서 서울이 함락된 것을 확인하고 미 지상군의 투입만이 상황을 수습할 수 있다고 판단할 때 한강 방어선의 장병에게서 받은 결사의 투지와 항전의지에 큰 감명을 받았다. 한 장병에게 “언제까지 이 자리를 지킬 것이냐”고 묻자 “명령이 있을 때까지”라고 단호하게 답변하였다. 맥아더는 이에 감명을 받고 이런 청년들이 있는 한국은 지켜줄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라는 생각을 다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전 장병이 김홍일 장군의 지휘하에 결사의 감투정신으로 단결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북한군은 7월 3일 경인선 철교를 통해 한강을 도하하여 노량진에 진출하였다. 아군은 7월 4일 수원-평택으로 후퇴하였으나, 그동안 귀중한 5일을 벌었다. 북한군이 한강 도하를 지체한 이유로 서울을 함락함으로써 이제 전쟁은 끝났다고 본 안일한 상황판단, 또는 한강대교가 폭파된 상태에서 도하장비가 부족하였다는 등의 설명도 가능하지만 한강 남안에서 합류해야 할 2군단을 기다리느라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 군사적으로는 타당한 설명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김홍일의 분전이 가장 큰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후 김홍일은 1군단장으로서 서부전선에서 낙동강 방어선에 이르기까지 차령산맥, 소백산맥 일대에서의 지연전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모든 면에서 국군보다 압도적인 북한군에게 공세적인 방어작전과 지연전을 연결시키면서 막대한 출혈을 강요하였다. 특히 7월 4, 5일의 동락리-무극리 전투와 7월 17일에서 22일의 화령장 전투에서는 북한군 15사단의 2개 연대를 섬멸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8월 초 낙동강 전선에 도달할 때까지 북한군이 입은 손실 5만6천명 중 5만명이 국군에 의한 것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 후 장개석 총통과 교분이 두터운 김홍일을 중국 대사로 기용하면서 ‘5성장군’이라는 휘호를 내렸다. 국군에 아직 원수 계급은 없지만 김홍일 장군의 전공은 5성장군으로 부르기에 족하다는 감사와 상찬의 뜻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김홍일 장군, 김종오 장군, 꽃다운 나이에 산화한 용사들, 이들이 대한민국을 지켜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