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⑬새로운 ‘강적’ 등장···북한군의 지휘력

1950년 7월 5일 새벽 미 24사단 선발대인 스미스부대는 오산 북쪽의 죽미령에서 유경수의 105전차사단의 107전차연대와 조우하였다. “노란 색깔의 동양인 부대는 천하무적의 미군이 참전하였다는 것만 보고도 도망가고 말 것”이라는 미군의 호언장담이 무색하게 스미스부대는 T-34전차에 무참하게 유린당했다. 180여명이 전사 또는 실종되었으며, 105mm 곡사포를 위시한 모든 공용화기를 잃었다. 곡사포 1개 포대로 지원된 소총 2개 중대 병력으로 2차 대전 중 명성을 날린 T-34전차로 무장된 적의 기갑부대를 상대하려 했던 것은 만용이었다.

사단장 딘 소장은 7월 2일 부산에 도착하고, 7월 5일까지 34, 19 및 21연대 잔여병력을 한국으로 이동시켰다. 사단장은 34연대를 평택-안성에 배치하여 제2저지선을 점령하게 하였으나, 스미스 부대를 유린하고 밀어닥친 적 전차에 질린 34연대는 미처 저항할 겨를도 없이 7월 6일 평택-안성선을 포기하고 천안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격분한 사단장은 연대장을 경질하였으나, 8일에는 천안이 무너지고 12일에는 예비인 21연대가 조치원을 철수하여 금강으로 후퇴하였다. 이에 딘 소장은 7월 12, 13일 금강에 있는 모든 교량을 파괴하도록 명령하고 19, 34연대를 전방, 21연대를 예비로 하여 대전방어선을 쳤다.

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24사단이 금강의 천연장애물을 이용하여 대전에서 지연작전을 감행한다면 새로 증원된 25사단과 1기병사단을 전개시켜 차후 작전에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일단 낙동강 선까지 더 이상의 손실 없이 철수하여 한반도 남단에 교두보를 확보하면 전세를 만회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였다.

북한군은 7월 14일 새벽 3사단과 105전차사단이 주공으로 조치원-대전 정면에서? 24사단을 압박하고? 조공인 4사단은? 24사단의 좌익을 포위하였다. 16~18일 사이에 북한군 주공은 미 34연대 및 19연대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공주에서 금강을 도하하였다. 이것으로 불과 사흘 만에 금강방어선이 무너지게 되었다. 사단장 딘 소장은 17일 34연대로 대전 방어를 강화하고 19연대는 영동으로 철수시켜 21연대와 더불어 지연진지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금강을 도하한 조공 4사단은 유성~논산으로 우회하여 미군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공격개시 전에 이미 대전을 포위한 북한군은 19일 새벽에 공격을 개시, 대전 시내에 진입하였다.

미군은 사단장이 직접 3.5 로케트포로 적의 T-34를 사격하는 등 완강한 시가전으로 적을 저지하였으나, 역부족으로 20일 새벽 대전은 실함되고 말았다. 24사단은 사단장 딘 소장이 실종되고 (8월 25일 포로가 되었다.) 1개 사단분의 장비를 잃었다. 이 실패는 초급지휘관의 지휘능력 부족과 장병들이 전의를 상실한 데 있었으니, 가장 큰 원인은 일본 점령 근무에서 파생된 정신적 이완에 있었다. 사단장을 비롯한 고급장교들은 2차대전을 치러낸 베테랑들이었으나 초급장교들은 실전 지휘경험이 없고 장병들은 대부분이 신병으로 전의가 없었다.

미군의 졸전(拙戰)보다도 북한군의 선전(善戰)이 놀라왔다. 장비와 훈련, 특히 장교들의 지휘력은 미군이 상상도 못할 정도였다. 북한군은 일본군과도 次元이 다른, 노몬한과 장고봉에서 일본군을 유린한, 그 소련군을 복사(複寫)한 군대였다. 미군은 전혀 새로운 막강한 적을 만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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