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④ 대통령서 사단장까지 군 지휘체제 ‘엉망’

6·25때 전군이 통합·조정되지 못하고 각급 지휘관의 의지와 능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당시 우리는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을 건국한 공은 천추에 빛날 일이다. 1946년 2월 북한에 사실상의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세워지자 스탈린의 속셈을 간파한 이승만은 그해 6월 정읍발언으로 단독정부 수립의 깃발을 올렸다. 전 민족이 통일 한국의 꿈에 부풀어있던 당시의 상황에서 누구도 하지 못한 탁월한 영단(英斷)이었다.

이승만은 이처럼 정치가로서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정전협상 과정에서 미국으로부터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내는 등 외교에는 귀신이었으나, 군을 유지·운용하는데 필요한 경험과 식견은 부족하였다. 영국 상선 선장 출신의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문민장관으로서 대통령을 대리하여 국군을 실질적으로 지휘, 감독하기에 자질과 경험이 부족하였다.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은 청산리전투의 영웅으로서 국방부장관을 겸했으나, 족청(族靑)을 숙정한 이승만에 의해 정부에서 배제되었다.) 결국 군을 지휘하는 책임은 전 일본군 병기소좌였던 채병덕 총참모장이 지게 되었는데 초기 전역에서 드러난 대로 그 역시 이 중책을 감당만한 자질과 경험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 구조와 인물은 국군의 문민통제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었으나 그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는 점에서 군의 문민통제의 요건에 대해 많은 시사점과 교훈을 주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문민 국방부장관을 당연시하나 자격을 갖춘 문민국방장관을 구하는 것은 쉬운 것이 그리 아니다. 문민통제의 고전으로 통하는 <군인과 국가>의 저자 사무엘 헌팅턴은 국방장관의 요건으로서 ‘군의 대변자’(military spokesman), ‘기업경영자’(business manager), ‘정책전략가’(policy strategist)을 꼽고 있는데 미국에서도 맥나라마, 럼스펠드, 게이츠와 같이 탁월한 국방부장관으로 꼽을 수 있는 인물이 흔한 것은 아니다.

육군본부의 주요 참모진과 일선 사단장은 거의 20대의 청년장교들로서 일본군, 만주군에서 소부대를 지휘한 경험밖에 없어 전군의 작전지도 내지 대부대 운용에 미숙한 점이 많았다. 육군본부에서는 8개 사단을 직접 통제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간부들의 전략, 작전개념상의 통일이 충분하지 못하고 통신수단이 불비한 당시 여건에서 육본과 사단 사이에 중간제대 없이 전군의 작전을 통합·조정한다는 것은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결론적으로, 6·25당시 우리 정부와 군의 전쟁지도체제와 작전지휘체제는 대통령으로부터 일선 사단장에 이르기까지 전쟁을 치른다는 각오와 이를 감당해낼 수 있는 체제를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했다. 즉 근대국가의 본질적 속성인 국방국가라는 차원에서는 건국(建國)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한국은 비로소 바로 선 국방국가가 되었다. 지금 우리는 6·25를 총체적으로 조망하고 평가할 수 있는 잇점, 즉,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라는 hindsight의 이점을 가지고 있다. 이 유리한 점을 살려보자.

모름지기 行有不得者 皆反求諸己(행유부득자 개반구제기, 행하고도 결과를 얻지 못하면 자기 자신을 반성 해야한다)가 발전의 첫 걸음임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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