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 쓰는 6·25] ①춘천회전···작전은 군인들 피땀으로
6월 25일 공격이 개시되자 북한군 조공집단인 2군단은 화천-춘천 및 인제-홍천 접근로에 각각 1개 사단을 지향토록 하였는데, 주공인 2사단은 춘천을 점령함과 동시에 신속히 이천을 경유, 수원으로 우회 기동하여 서울에 집중하게 될 한국군 주력을 남서 방향에서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 작전의 성공 여부는 25일 당일 춘천을 점령할 수 있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었다.
춘천 소양강변에 최후저항선을 설정한 6사단 7연대(연대장 임부택 중령)는 하천선 방어진지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적에게 출혈을 강요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2사단은 40%의 손실을 입어 돈좌된다. 이에 당황한 인민군은 홍천을 목표로 공격중인 조공 7사단 및 독립 전차연대의 일부를 춘천으로 증원하였으나, 6사단은 서울이 실함된 6월 28일 정오까지 춘천을 고수하였다. (일본군 하사관 출신의 임부택 중령은 이병형 장군과 더불어 6·25 동란 중에 가장 전투를 잘한 대대장급 장교로 꼽힌다.)
진출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데 대해 김일성은 격노하였다. 2군단장 김광협은 무정으로 교체되고 군단참모장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당했다. 2사단장 이청송은 최현, 7사단장 전 우는 최충국으로 교체되었다. 김일성은 7월 3일 아예 7사단을 12사단으로 단대호를 바꿔버렸다. 그만큼 초기 전투에서 2군단의 부진은 인민군에게 충격이었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춘천전투는 북한군 2군단의 부진이라기보다 국군 6사단의 선전이라고 보아야 한다.
6사단의 선전은 6월 25일 김종오 사단장이 전군에서 유일하게 사단을 비상경계태세를 제대로 갖추고 있도록 한 것이 결정적이었고 이에 힘입어 장병들의 투혼도 놀라웠다. 대전차포중대 심일 소위는 특공으로 적 전차를 격파하여 전차에 공황상태가 된 보병의 사기를 올렸다.(심일 소위는 1951년 1월 전사하였으나 창군 이래 최초로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이로써 춘천을 공략하고 여주 근처에서 남한강을 도하하려던 2군단의 작전계획은 차질을 가져왔으며 한강을 도하하려던 1군단과 공격속도를 맞추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북한군이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도 한강을 바로 도하하지 않은 이유로 도하장비의 부족, 또는 서울 점령으로서 전쟁은 사실상 끝났다고 본 판단 미스 등 여러 설명이 있지만, 군사이론으로는 2군단의 진격이 늦어져서 분진합격에 차질이 생긴 것이라는 설명이 타당하다. 어쨌든 초전에서 북한군 2군단의 실패가 이후의 전세 전개에 큰 차질을 초래한 것은 분명하다.
춘천-화천의 국군 2군단에서는 춘천전투를 춘천대첩(大捷)으로까지 승화시켜 기념하고 있다. 민간 전사연구가인 소진철 대사는 춘천 전투를 세계 전사상에 빛나는 전투라고까지 의미를 부여하였다. 현 육군교육사령관 류제승 장군의 독일 루르대학교 박사논문 ‘6·25: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도 훌륭한 참고가 된다. (제5장 전쟁의 발발과 전개, pp. 173~174 참조)
흔히 전쟁은 정치가나? 민간 이론가에 의해 주도, 해석되지만, 실제로 작전은 군인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