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김정은이 B-52 출현에 ‘기겁하는’ 이유

강건의 본명은 강신태이다. 강건은 동북항일연군에서는 제5군 9단 정치위원이었고 88여단에서는 김일성과 같이 대대장이었다. 해방 이후 강건은 김일성과 함께 바로 귀국하지 않고 보안간부훈련대대를 위한 군사경력자들을 모을 때 김광협과 함께 입북하여 나남의 2사단장이 되었고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이 창설되자 총참모장이 되었다. (이래로 북한군은 2·8절을 건군절로 기념하여 왔으나 1978년부터 김일성이 항일 유격대를 조직하였다는 1932년(당시 20세) 4월 25일을 건군절로 기념하고 있다) 강건은 조선민주당 당수 등 정치공작에 바쁜 민족보위상 최용건을 대리하여 인민군 건설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북한군의 작전지도에 있어서 전선사령부가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사령관에 김책이라는 최고위급이 임명되었을 뿐 아니라 그 참모장에 민보성 총참모장인 강건이 임명되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북한군의 작전지도에 있어서 전선사령부가 대단히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다는 것은 강건이 폭사하자 후임에 당시 1군단장이었던 김웅을 임명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전국의 승패가 가름나는 결정적 시기에 군단을 지휘하고 있는 지휘관을 전선사령부의 참모장으로 끌어 올린 것은 유례가 드문 일이다. 그런가 하면 김일성은 춘천 공략 실패의 책임을 물어 2군단장 김광협을 해임하고 후임에 무정을 임명하였는데 춘천 전투의 실패가 얼마나 큰 차질을 가져왔는가를 알 수 있다. 국군은 이를 ‘춘천대첩’이라 부른다.

강건은 1950년 9월 공세 중 미 공군의 폭격으로 전사하였다. 9월 공세를 위하여 북한군은 13개 보병사단, 1개 전차사단, 2개 전차여단을 배치하였는데 총병력은 9만8000명이었다. 북한군은 사단이 전투에 극심한 손해를 입어 대대 정도로 약화되더라도 부대의 건제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북한군은 당시 오직 120대의 전차만을 보유하였는데 이는 68대의 전차로 편성된 미군 전차대대에 비교하면 2개 대대 규모에 불과하였다. 한편 이 기간에 유엔군은 5개 한국군 사단, 4개 미군 사단, 1개 미해병 여단, 1개 영국군 여단을 포함하여 12만4000 명의 병력과 500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9월 공세의 절정은 9월 2일부터 12일 사이의 영천전투였다. 영천을 점령하게 되면 한국군 방어선을 둘로 절단할 수 있게 되고 북한군은 대구에 진출할 수 있었다. 9월 6일 박성철의 15사단이 영천을 점령하게 되는데, 이는 낙동강 방어작전 최대의 위기였다. 유재흥 소장의 2군단은 9월 12일 영천을 탈환하고 방어선을 회복하였는데 이것이 영천회전(永川會戰)이다. 여기까지가 북한군의 공세종말점이었다. 9월 15일에는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이 개시된다.

9월 공세 중 미공군은 B-29 99대를 동원하여(노르망디 상륙작전 이래 최대 규모) 낙동강 도하를 위해 왜관 북방에 집결한 인민군에 융단폭격을 가하는데 기록에 생생히 나와 있다. 이제 김정은의 장령들은 이를 경험한 세대가 별로 없고 선배들에게 말로만 들었겠지만, 최근 B-52와 B-2의 출현에 기겁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국군은 공산권 군대와 같이 오래 현역에 머무를 수는 없지만 부단하고 철저한 전사공부를 통하여 연륜을 늘이고 내공을 쌓아나가는 것이 필요하며 민간인들도 역사를 통하여 이 나라가 어떻게 세우고 지켜진 나라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은 국민의 마땅한 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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