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대북협상에서 ‘형식’이 중요한 이유
어느 신문사 대기자의 칼럼에서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형식 없는 내용은 맹목적이고, 내용 없는 형식은 공허하다’고 말했다”라는 구절을 보았다. 신문에서 철학자의 명문을 보는 것은 반가운 일이기는 하나, 정확하게는 “내용 없는 사상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가 맞는 말로서 칸트의 인식론의 핵심인 선천적 종합판단을 요약한 말이다. 두 문장 사이의 함의(含意)는 차이가 있다. 남북회담에서 대표의 격도 중요하나 다루고자 하는 내용을 감안하면 좀 더 실질적인 접근을 했더라면 하는 고언(苦言)을 표현하는 데 인용될 문장은 아니다.
북에서 당 비서의 위상은 대단하다. 하기야 상좌가 내각의 부부장 정도는 우습게 보는 것이 북한이다. 북한의 현실은 그렇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정상적(normal)인가? 또는 통상적(ordinary)인가? 일반 상식과 국제적 기준에 맞는 말인가? 북한을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당의 통일전선부장이면 우리 국무원의 통일부장관과 격이 같다고 보는 것이 상식(common sense)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북한의 생각은 다른 데 있는 것이다. 지난 10년간 북한 권력과 그 수족들을 잘못 길들인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회담에 나오는 사람들은 북한에서 기본적으로 하루 세 끼 걱정은 없는 자들로서 김대중 노무현 시절 호의호식하던 자들이다. 이명박 정부 5년 내내 재미를 못 보다가 박근혜 대통령의 신뢰 프로세스에 기대를 걸어보았지만 몇 번 찔러보니 만만치 않아 역시 별 볼일 없겠다는 판단을 하니 무슨 수로든 회담을 깨고 나오는 것이다. 북에서는 “미련 없다!”로 나왔다. 아마 조그마한 미련은 가졌던 모양이다! 배가 더 고파봐야 정신이 번쩍 들 것이다.
남북장성급군사회담을 할 때 일이다. 북쪽에서는 저희들은 별 하나라도 소장(少將)이니 남쪽에서도 소장이 나오라고 하였다. 왠 걸 남쪽에서 소장은 별이 둘인데! 너희도 별 둘이 나와야 응하겠다. 그런데 북에서 별 둘은 중장(中將)이다. 이렇게 옥신각신 수십 시간을 끌었고 결국 북이 양보하여 우리는 별 하나, 준장(准將)이 나갔다. 북도 별 하나, 그러나 소장이었다. 청와대와 관련 부처에서도 국방부 장관의 권위를 배경으로 원칙적 입장을 견지하는 국방부 국장을 밀어붙이지 못하였다. 당시 국방부 입장이 옳다고 편을 들던 사람이 지금 통일부 차관 김남식이다. 북과의 협상은 전쟁이다. 남남갈등이라고 하나 국민의 마음을 잡는 정부의 노력이 주효하면 두려워 할 것이 없다. 현재 정부의 입장에 찬성하는 의견이 비판적 의견에 비해 3배를 넘고 있지 않은가?
“개성공단 이주기업들과 고령 이산가족들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급할 것 없다. 시간은 우리 편이다’라는 청와대 관리들의 언동은 너무 한가하다. 당국 회담 무산의 책임이 남북한 모두에게 있다는 양비론을 북한에 면죄부 준다고 규탄하는 것은 속 좁고 부당한 공론탄압이다.”
어떻게든 대화의 자리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을 “(중략) 내용 없는 형식은 공허하다”고 점잖게 지적한 것이지만 혹시 형식이 가장 바로 중요한 내용이 되는 것이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에서 결코 잊지 말아야 본질이라는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