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북-중관계 제대로 알면 남북관계해법 보인다
미군들에게 한국과 미국은 같이(together) 싸운 나라고 일본과 미국은 상대하여(against) 싸운 나라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한미일이 가깝다고 하여도 이 역사적 사실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교육(?)하고는 했다. 한국과 미국이 혈맹관계이듯이 중국과 북한도 혈맹관계이다. 한중관계가 아무리 가까워진다고 하더라도 남북미중관계에서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정부 당국자는 물론, 일반 국민들에게도 강조하고 싶다.
북한과 중국의 관계는 6·25사변에 중공군이 개입하기 훨씬 이전부터 깊은 관계가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1937년부터 조선인 부대를 조직하기 위한 계획을 추진했다. 중공군 포병의 창시자이고 대장정에 참여했던 武亭(본명:김무정)이 그 임무를 맡았다. 1941년 7월 산서성 진동남에서 무정을 사령원으로 조선의용군이 발족했다. 해방이 되어 북한으로 들어가고자 한 조선의용군은 소련군의 제지를 받았고 1945년 12월에야 개인 신분으로 북한에 돌아오게 되었다. 이는 미군정 하에서 광복군이 개인 신분으로 남한에 들어오게 된 것과 같다.
6·25전쟁 발발시 중국에서 귀환한 조선인들은 3만명에 달했다. 1949년 7월 하순에 방호산이 이끄는 중공군 166사단이 신의주에 도착하여 인민군 6사단으로 개편되었고, 8월 하순에는 김창덕 지휘하의 164사단이 도착하여 인민군 5사단이 되었다. 1950년 4월 중공군 사단들에 있던 한인 병사들이 북한으로 송환되어 인민군 7사단이 되었다. 이들 중공군내 한인들은 당시까지 3개 사단, 1개 여단 규모였던 인민군 전력을 배가시켰을 뿐만 아니라 오랜 기간의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통하여 단련된 전사들로서 인민군을 질적으로 강화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역으로, 이들 한인들이 중국공산당의 중국 장악에 일정 부분 기여를 하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 중공군은 1937년 8로군으로 개편될 당시 12만명 규모로 출발하여 1945년 해방 당시에는 100만명으로 성장하였으나, 국공내전이 1948년 전환기에 달할 때까지 6만의 한인 무장력은, 특히 만주에서는 상당한 전력이었다. 이처럼 북한군과 중공군의 간부들은 오랜 전우들이었다. 모택동과 김일성이 특수관계를 유지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 혈맹관계가 역사적 전환기에 놓여 있다. 미중정상회담에서 “진정성 있는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확인해야 한다”는 대목이 들어가 있는 것은 이를 상징한다. 중국이 미국과 신대국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이와 관련해 일정 역할을 하라는 요구를 중국이 수용한 것이다. 한중정상회담은 이 변화의 기운을 타고 대미를 장식할 것이다. 북한이 구태의연한 행태를 보이는 것에 일희일비할 것은 없다. 지금까지의 단호하고 일관된 정부의 스탠스 유지는 훌륭하다. 이번 남북회담의 무산은 정상적인 남북관계의 정립을 위해서는 꼭 겪어야 할 진통이다.
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우리 정부가 (수석대표로) 김양건이 나오도록 북에 요구한 것을 두고 정부에 불평을 늘어놓았다. 탈북자를 돕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박선영 전 의원은 “남북관계를 지금까지의 행태로 몰아오는 데 원인을 제공한 박지원 의원은 자기반성부터 해야 할 것”이라고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남북군사회담을 진행한 경험으로 보건대, “형식이 내용을 결정한다”는 박 대통령의 지적은 남북관계를 풀어나가는 데 있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기본명제(基本命題), 테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