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김일성의 책사’ 김책과 맥아더

김책은 동북항일연군에서는 군 정치위원으로서 사장(師長)이었던 김일성보다 상위에 있었고 88여단에서는 대대 정치위원으로서 대대장이었던 김일성과 동격이었다. 8.15 후 김일성과 함께 입북한 김책은 스탈린에 의해 북한의 지도자로 발탁된 김일성의 오른팔로서 김일성 그룹의 참모장 역할을 하였고 특히 평양학원의 원장으로서 북한군 창건의 핵심이 되었다.

6.25 남침 시작 후 3일 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득의만면하던 김일성은 6월29일 B-29가 평양을 공습하고 뒤이어 미 지상군이 참전하여 소련군 고문관이 자취를 감추자 전쟁지도 및 작전지휘체제를 대폭 개편하였다. 7월4일 자신이 직접 최고사령관을 맡고 7월5일에는 전선사령부를 편성, 김책을 전선사령관, 강건을 참모장에 임명하여 남침작전을 통할하게 하였다. 이후 한국전쟁의 지상전은 유엔군의 워커와 북한군의 김책이 대결하는 양상이 된다. 김책이 남침전쟁 전반의 북한군의 중심인물이라 함은 이를 말한다. (김정일 당시 당 비서였던 김국태는 김책의 아들이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탁월한 것은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작전을 고안해낸 것이 아니다. 북한은 일본 내의 첩보망을 통하여 인천상륙작전 첩보를 입수하고 인천의 방어를 강화하였으나 낙동강 전선에 집중하고 있던 상황에서 전력을 빼어내는데 역부족이었다. 맥아더는 부산 점령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의 병력을 빼돌리지 못하리라는 것을 간파하고 동시에 워커의 8군이 낙동강 교두보를 지탱해내리라는 것을 확신하였던 까닭에 낙동강 전선을 보강하지 않은 채로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하였다. 전략가로서 맥아더의 훌륭한 점은 여기에 있다.?

9월15일 인천에 상륙한 10군단은 낙동강 전선에서 북상한 8군과 9월26일 오산에서 연결에 성공하였다. 독 안에 든 북한군은 궤주했다. 조선의용군 계열 방호산의 6사단이 겨우 전투서열을 유지하였을 뿐 대부분의 북한군은 궤산되었다. (이 공으로 방호산은 2중영웅 칭호를 받았다) 패주하던 북한군은 중부의 철의 3각 지대에 숨어들었고 최현은 이 전력으로 제2전선을 구축하게 된다. (이 과정은 북한의 <조국해방전쟁사>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당시 북진을 서두른 국군과 유엔군은 이 북한군의 존재를 파악하지 못한 채였다.

인천상륙 성공 후 맥아더는 후퇴하는 북한군을 완전 포착하기 위해 다시 원산 상륙작전을 구상하였다. 이를 위해 북진 중이던 10군단을 투입하기로 하였는데 결과적으로는 대군을 2주 동안이나 유병(遊兵) 상태에 두는 실책이 되었다. 원산만의 소해작전에 시간을 보낸 10군단은 10월26일에야 원산에 ‘행정상륙’하였는데 10월1일 동해안에서 38선을 돌파한 한국군 1군단은 이미 10월10일 원산에 상륙한 뒤였기 때문이다.

원산에 상륙한 10군단은 함경도 해안을 따라 북진하여 혜산진을 향해 북상했다. 이때 8군의 우익과 10군단의 좌익 사이에는 50마일이 넘는 갭이 생겼는데 철의 3각지대에서 낭림산맥에 이르는 한반도의 중추지역이다. 중공군과 북한군은 바로 이 갭을 파고들어 8군의 우익과 후방을, 10군단의 좌익과 후방을 포위하였다. 이렇게 두 개의 야전군의 측방과 후방이 적의 포위공격을 받은 것은 전사상 드문 일이다. 유엔군의 후퇴는 파국적이었으며 미국은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여 맥아더를 해임하고 한국전쟁의 정전을 모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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