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2월 29일 미 합참은 새로운 정책결정과 전략계획을 요구한 맥아더 장군에게 “유엔군의 전력보존에 유의하여 축차적인 방어작전을 수행하되, 일본방위에 대한 위협을 고려하여 한반도로부터 철수작전을 수행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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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32) 독선·편견으로 중공군 개입의도 오판
미 8군과 10군단을 연결시키지 않은 것은 작전상의 실수이나, 그보다 근본적인 실패는 중공군이 개입하지 않으리라고 본 전략정보 판단상의 실수였다. 이것은 맥아더 장군만이 아니라, 트루만 대통령과 합참,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29) 미 육군 초토화, 그러나 Chosin Few는 전설로 남아
11월 27일 중공군 9병단 예하 79, 89 및 59의 3개 사단이 장진호 일대에 매복하고 있다가 미 해병 1사단을 기습 공격하였다. 그 후방에서는 58 및 76사단이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22) 유엔 통한(統韓)결의안과 북진명령
한국전쟁 초기 중공 및 소련과의 전면대결의 회피를 전제로 삼았던 미국은 목표를 전쟁 이전 상태의 회복에 둠으로써 38선 이북으로의 진격을 주저해왔다. 그러나 8월 후반 낙동강 전선이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21) 美 ‘무조건항복’ 요구, 6·25전쟁 장기화 초래
낙동강 전선의 8군은 1950년 9월 16일 일제히 반격을 개시하였다. 주공인 미1군단(1기병사단, 24사단, 5연대전투단, 국군 1사단 및 영연방 27여단)은 9월 20일 낙동강을 건너 쾌속의 진격을 계속해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임관 48년’ 노병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에는 미10군단이 동원되었는데 제1해병사단과 제7보병사단을 주축으로 한국군 독립17연대와 해병 4개 대대가 투입되어 총 7만명에 달하는 대군이었다. 작전에 동원된 함정은 8개국에서 261척이 참가하였다. 이는 노르망디상륙작전 이래의
[김국헌의 직필] 인천상륙작전 ‘맥아더신화’, 한달 만에 막내린 이유?
승패는 오로지 장수에 달려 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전략구상이 아니었다. 김일성은 이미 8월 28일 박훈일을 인천방어사령관으로, 9월 11일에는 최광을 서울방어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이를 민족보위상
[김국헌의 직필] ‘김일성의 책사’ 김책과 맥아더
김책은 동북항일연군에서는 군 정치위원으로서 사장(師長)이었던 김일성보다 상위에 있었고 88여단에서는 대대 정치위원으로서 대대장이었던 김일성과 동격이었다. 8.15 후 김일성과 함께 입북한 김책은 스탈린에 의해 북한의 지도자로 발탁된
[김국헌의 직필] 하라 세쓰코와 맥아더, 그리고 역사인식
하라 세쓰코. 일본이 미국 통치하에 있을 때 맥아더 원수의 시중을 들던 당시 일본 제일의 배우다. 세쓰코는 나라가 망했으니 몸을 바치는 것은 각오할 수밖에 없다고 받아들이고
[김국헌의 직필] 박근혜와 ‘걸프전 영웅’ 슈와르츠코프
걸프전 당시 미 중부군사령관이었던 슈와르츠코프 대장이 최근 타계하였다. 슈와르츠코프는 2차대전시 독일의 롬멜, 영국의 몽고메리, 소련의 주코프, 그리고 맥아더에 비길 수 있는 전쟁영웅이었다. 걸프전쟁은 사실상 7일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