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임관 48년’ 노병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에는 미10군단이 동원되었는데 제1해병사단과 제7보병사단을 주축으로 한국군 독립17연대와 해병 4개 대대가 투입되어 총 7만명에 달하는 대군이었다. 작전에 동원된 함정은 8개국에서 261척이 참가하였다. 이는 노르망디상륙작전 이래의 대군이었는데 이런 규모, 이런 방식의 상륙작전은 앞으로 좀처럼 있기 어려울 것이다.

독립17연대는 화령장 전투에서의 승리로 백인엽 연대장 이하 부대 전 장병이 한 계급 특진하였는데 17연대가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면서 백인엽은 다시 대령을 달고 참전하였다.

북한은 내무성 경비국장 박일훈을 중심으로 인천지구방어사령부를 편성해 64해안방어연대, 106, 107 경비연대, 1개 전차연대, 1개 보병대대를 배속시켜 유엔군의 상륙에 대비하였으나 유엔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특히 북한의 해공군은 개전 즉시 미군에 의해 사실상 소멸되었으므로 유엔군 상륙전력을 수제선상(水際線上)에서 저지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었다.

독일군의 대표적 명장 룬트슈테트와 롬멜은 연합군 상륙 저지에 실패했다. 왜냐하면 상륙저지에 결정적인 전차사단을 히틀러가 손안에 틀어쥐고 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인천상륙작전은 같은 선상에서 논하기는 어렵다.

현재 북한군의 해공군과 해안방어 전력은 당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화되었다. 따라서 해병대는 공지기동군(空地機動軍)으로 발전되어야 하는데 한국 해병대는 반드시 미해병대와 연합으로 작전하게끔 되어 있으므로 미해병대와 상호 보완되는 병력과 장비를 갖추는 것이 경제적이고 능률적일 것이다.

9월 27일 새벽 해병대 1대대의 박정모 소위가 중앙청에서 인공기를 끌어내리고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이는 서울 수복의 상징이었고 사라져 가던 대한민국이 되살아난 순간이었다. 원래 중앙청은 미 해병5연대 작전지역이었는데 5연대에 배속된 1대대장 김종기 소령이 중앙청에 태극기는 반드시 우리 손으로 게양하겠다는 일념으로 박정모 소위에게 임무를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소원이기도 하였다고 당시 PC 704함을 지휘하여 작전에 참가하였고 이후 6대 해병대 사령관을 지낸 공정식 장군은 회고하고 있다.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 이 두가지 작전에서 국군과 유엔군이 올린 전과는 적 사살 1만4000, 포로 7000명이었다. 이에 비해 아군 피해는 부상자를 합쳐 미 해병대 2450명, 한국 해병대 400여명, 미 육군 300여 명에 불과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은 9월 29일 중앙청에서 열린 환도식을 끝으로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맥아더는 이승만 대통령에 서울 인계를 선언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에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을 못미더워했던 트루만은 ‘대전사(大戰史)에 유례가 드문 작전’이라는 말로 작전을 치하하였다. 1902년 임관 이래 50년의 군무에서 온갖 영광과 명예를 얻은 노병 맥아더의 절정이었다.

6·25는 꼭 기억하여야 할 날이라면,?9월28일은 우리가?반드시 기념해야 할?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