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22) 유엔 통한(統韓)결의안과 북진명령

한국전쟁 초기 중공 및 소련과의 전면대결의 회피를 전제로 삼았던 미국은 목표를 전쟁 이전 상태의 회복에 둠으로써 38선 이북으로의 진격을 주저해왔다. 그러나 8월 후반 낙동강 전선이 안정되고 인천상륙계획이 구체화되자 미국의 태도는? 변하기 시작하였다. 9월 1일 국가안보회의 참모들은 정책건의안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만일 한반도에서 소련에 대하여 유리한 입장을 확보하고 국가이익을 신장할 수 있는 기회가 포착된다면 미국은 결코 이러한 기회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데 의견이 일치하였다. 이에 따라 유엔군의 북진을 위한 기본방침이 수립되고 재침의 근원을 제거하기 위하여 유엔군의 작전목표를 북한군의 격멸에 두게 된다.

9월 11일 트루만 대통령은 이 정책건의안을 재가하였으며, 9월 15일 맥아더 장군에게 북한점령계획을 준비하되, 실행은 차후 별도의 승인을 얻어 수행하라는 예비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따라 합참은 9월 27일 북한진격을 승인하는 훈령-전제와 제한을 담은-을 하달한 것이다.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하면서 미국의 관심은 중·소의 반응을 포착하는데 집중되었으며, 특히 소련의 지원 하에 중공이 침입해올 가능성을 주시하였다. 중공은 9월 하순부터 대미비난을 격화하였다. 9월 22일 외상 주은래는 “북한에 대한 미국의 침략을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를 하고, 10월 3일에는 주중 인도대사 파니카에게 유엔군이 38선 이북으로 진격을 계속할 경우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할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한국군만의 단독 북진은 문제시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같은 날 소련의 비신스키 외상은 유엔 정치위원회에 휴전안을 제출하였다. 이러한 소련의 휴전제의는 부결되고, 대신 영국이 제안한 한반도에 통일된 민주정부를 수립하자는 서방측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이것이 유엔의 10·7 통한결의이다. 10월 9일 맥아더 장군은 김일성에게 두 번째로 항복을 권고하는 최후통첩을 발하였고 중공은 북경방송을 통해 중공군의 개입경고를 함으로써 이에 맞섰다.

미국은 전세의 호전에 따라 고조되어 가는 낙관적 분위기 속에서 정치 및 군사적으로 취약점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중공의 경고나 개입징후를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10월 9일 합참은 맥아더 장군에 “설사 중공군이 침입해오더라도 귀관의 판단에 따라 북진을 계속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이에 맥아더 장군은 북진명령을 내린 것이다.

트루만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의 고위 정책 수립자들이 중공의 개입 의도나 능력을 경시하고 북한의 조기 점령을 낙관한 것은 트루만과 맥아더의 10월 15일 웨이크섬 회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회담에서 맥아더는 설사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 북한으로 침입해오더라도 그들이 평양선에 도달하기 전에 유엔군의 막강한 공군력으로 섬멸될 것이라고 장담하면서 조기종전 가능성을 비추었고 트루만은 맥아더의 소신에 만족하며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바야흐로 한국전쟁은 ‘미니 세계대전’으로 가고 있었다. 그것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측과, 소련 및 중공의 건곤일척의 대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