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31) 교통사고 워커 후임에 릿지웨이 임명
12월 15일을 전후하여 임진강~38도선을 연한 방어선으로 철수한 8군은 미 1군단의 25사단과 한국군 1사단을 문산~서울 축선에, 미 9군단의 한국군 6사단과 미 24사단을 철의 3각지~서울 축선에, 한국군 2사단, 5사단, 8사단을 춘천~원주 축선에 배치하여 일련(一連)의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12월 20일경 묵호와 부산에 상륙했던 한국군 3사단과 9사단이 북상하여 태백산맥 以西에는 한국군 3군단이, 이동에는 수도사단을 기간으로 한 한국군 1군단이 각각 배치됨으로써 전체 전선에 걸쳐 연결된 방어선이 구축되었다. 그러나 1개 사단의 정면이 30km에 달하였기 때문에 적의 침투를 저지할 수 없는 부대 간의 간격이 도처에 형성되어 있었다.
평양 부근에서 부대정비를 마친 중공군 13병단의 6개 군은 크리스마스를 전후해서 38도선으로 이동하여 서울 점령을 목표로 문산과 철원에 집결하였다. 중동부 지역의 한국군 3군단 지역에는 북한군 2군단이 3군단, 5군단과 합세하여 인제~현리~평창 축선을 중심으로 돌파구를 형성하고 있었다. 북한군은 원주를 점령하여 중앙선 축선을 거쳐 부산으로 진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동시에 서울의 동 측방에 위협을 가하려 하였다.
중공군과 북한군의 작전협조는 중조(中朝)연합사령부를 통하여 이루어졌는데, 후일의 한미연합군사령부와는 달리 예하부대에는 목표와 대략의 기동계획만 주어지고 작전의 세부실행은 중공군과 북한군의 각 군단에 맡겨졌다. 이는 당시 공산군의 지휘·통제· 통신체제가 오늘의 한미연합사령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낙후된 상태였고, 중공군이나 북한군의 군단장, 사단장들은 이미 역전의 베테랑들이었기 때문이다.
10월 중순 북한군이 급속히 증편되었다. 민족보위상 최용건이 만주로 건너가 동북항일연군 참전용사들을 모아 기존의 1, 2군단 외에 6개의 군단이 새로 만들어졌다. 남침 초기 사단장들이었던 방호산, 이권무, 이영호, 유경수, 최용진 등이 군단장이 되었다.
이제야 8군과 10군단의 지휘권이 통합되었다. 8군과 10군단을 분리시킨 맥아더의 판단 착오가 이 모든 참극의 시초였다고 한다면 이제야 정상적인 대진(對陣)이 이루어진 것이다. 미 극동군사령부의 부사령관 겸 참모장의 직책을 보유하면서 10군단장을 겸한 알몬드는 맥아더와 개인적으로 가까웠고 워커와는 서로 경쟁상대였다. 이를 감안하여 맥아더는 10군단을 독립군단으로서 유지하려고 하였는데, 이러한 지상군의 작전권 분리로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에 광대한 공간이 생기게 되는 사태를 초래한 것이다. 공격은 종대(縱帶)로 하지만 방어는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 연결되지 않으면 적이 그 공간으로 침투하여 측후방을 포위하게 되는 상황이 일어나게 된다.?이것은 보병전술의 기본이다.
이때 유엔군의 사기는 최악의 상태로 떨어지고 패배의식이 만연되어 있었다. 이 어려운 시기에 낙동강 전선의 용장 워커 장군이 서울 북방에서 교통사고로 순직하여 충격을 안겨주었다. 12월 26일, 2차대전시 18공정군단장으로 용명(勇名)을 날린 릿지웨이 중장이 후임으로 부임해왔다.
도쿄의 사령부에서 맥아더를 만난 리지웨이가 작전지도 지침을 구하자 맥아더는 “8군은 귀관의 것이다. 귀관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이야말로 훈령통수(訓令統帥)의 극치라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