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32) 독선·편견으로 중공군 개입의도 오판

미 8군과 10군단을 연결시키지 않은 것은 작전상의 실수이나, 그보다 근본적인 실패는 중공군이 개입하지 않으리라고 본 전략정보 판단상의 실수였다. 이것은 맥아더 장군만이 아니라, 트루만 대통령과 합참, 정보기관 모두 이 책임에서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1950년 10월 25일 서부에서 진격 중이던 한국군 1사단이 낯선 군복차림에다 말이 통하지 않는 1명의 적을 생포하였다.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중국어에 능한 백선엽 사단장이 직접 신문하여 중공군임을 확인하였다. 중공군 포로 1호였다. 이 포로의 진술에 따라 “운산 북쪽과 희천 방면에 다수의 중공군이 배치되어 있다”는 첩보가 입수되었다. 그 내용이 당시 미 8군의 정보판단과는 너무도 먼 것이어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곧이어 중공군 40군 예하 115, 116 및 117사단이 1사단 정면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사단의 상급부대인 미 1군단은 북한군을 증원하기 위하여 투입된 소규모일 것으로 가볍게 판단하고 압록강을 향하여 총공격을 명하였다. 그 결과가 군우리의 ‘인디안 태형’이었다.

이같은 상황은 동부전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 1해병사단은 11월 5~10일 고토리에서 중공군 포로 58명을 잡았는데 이들은 중공군 124사단 소속으로 밝혀졌다. 11월 8일 미 7사단이 획득한 포로도 중공군 126사단 소속으로 확인되었다. 동부에서 진격 중이던 한국군 3사단의 26연대가 10월 25일 장진호를 향하여 진격 중 水洞 부근에서 예기치 못한 완강한 저항에 부딪쳤고 낯선 차림의 적 3명을 포로로 하였는데 그는 중공군 8군 예하 5연대 소속으로 그 북방에 중공군 4000~5000명의 중공군이 잠복하고 있다고 진술하였다. 이는 1군단을 통하여 미 10군단으로 보고되었으나 10군단 정보처에서는 이를 믿으려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장진호의 ‘Chosin Few’였다. 장진호를 일본어로 ’쵸신‘으로 읽었는데 미군은 이를 따른 것이다.

중공군 전술에 대한 무지는 유엔군 장병들의 전의를 극도로 위축시켰다. 후방과 측방에서 중공군의 호각, 피리, 나팔 또는 징소리가 나기만 하면 병사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앞을 다투어 도망치기 일쑤였다. 이는 서방병법에 가장 치명적인 것으로 경계하는 포위-즉 칸네와 탄넨부르그에서 발휘된-를 연상하였기 때문이다. 산 속에서 은거하고 있다가 상상도 못한 시기와 장소에서 덮치는 중공군은 중국인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손자병법의 이일대토(以逸待勞)와 출기불의(出其不意) 그것이었다. 여포(呂布)와 같은 워커의 용맹을 조조(曹操)와 같은 팽덕회(彭德懷)의 간지(奸智)가 번롱(?弄)한 것이다. 1950년 겨울의 북한의 산야는 천(天)과 지(地)-지형과 기상-에서 중공군이 득의의 전법을 펼치기에 그만이었다.

8군과 10군단, 도쿄의 유엔군사령부는 곳곳에서 출현하는 중공군을 접하고도 전혀 다른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파국에 이르도록 깨닫지 못했다. 이것은 선입관과 편견, 독선과 오만 때문이었다. 즉, 확집(確執)이었다. 20세기 동양의 병부(病夫) 중국의 군대를 주로 국민당 군대에서 보아온 미군 지휘부로서는 전혀 다른 종류의 중국 군대가 나타났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많은 충격이 필요하였다. 이때 받은 충격은 20년 후 ‘붉은 나폴레옹’ 보 구엔 지압에게서 다시 되풀이된다.

“아시아의 지상전은 아시아가 책임지라”는 닉슨 독트린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확집(確執)은 그것이 지도자이든 군인이든,? 政治家이든, 경영자이든 누구도 절대로 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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