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28)’맥아더의 신화’ 무너지다···인디언 태형처럼
1950년 10월 하순 압록강으로 진출하려는 유엔군의 진격을 저지하여 1차 공세의 목표를 달성한 중공군은 11월 6일 새벽 전체 전선에 걸쳐 일부 병력만 남겨놓고 주력은 재편성을 위하여 일제히 잠적하였다. 그러면서도 유엔군이 철수하거나 협상을 제기하는 등의 반응이 있지 않을까 주시하면서 9병단의 12개 사단을 동부전선에 새로이 투입하여 2차 공세를 준비하였다.
맥아더 장군은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국경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극동 공군에 압록강 위 모든 교량을 폭격, 절단하라고 명령하였다. 미 행정부는 중공군의 출현에 따라 비등하기 시작한 국내외 여론을 의식하여 유엔군을 안전한 선에서 정지시킨 다음 완충지대를 설정할 것을 고려하였으나, 맥아더 장군의 강력한 반대로 철회하였다. 이제 만주폭격을 제외하고는 맥아더 장군은 그의 뜻대로 모든 군사적 방책을 수립하고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목표는 압록강까지의 진격이었고 이를 위해 8군의 우익을 보강하기 위해 한강 이남에서 대유격전을 전개 중이던 9군단을 북상시켰다. 워커 장군은 11월 15일을 잠정적인 D데이로 정하고 1군단을 左,? 9군단을 中央, 한국군 2군단을 右로 하여 압록강을 향해 병진(竝進)하는 공격계획을 하달하였다. 맥아더 장군은 나아가 이를 8군과 10군단을 연결시키는 협격작전(挾擊作戰)으로 변경시켰다.
8군은 보급추진이 늦어져 공격 개시일을 11월 24일로 수정하고 10군단은 27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공세는 중공군의 병력규모를 터무니 없이 과소평가하고 배치나 의도를 또 다시 오판한 것으로 공세가 시작되기 전에 결말은 이미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24일 새벽 공격을 개시한 8군은 큰 저항 없이 평균 10km씩 진출하였으나 25일 중공군과 조우하면서 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중공군의 2차 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서부전선에 전개한 중공군 6개 군 가운데 우익의 50군 및 66군은 미 1군단의 진격을 저지하고, 38군과 42군은 8군 우익으로 기동, 그 후방으로 진출하고, 39군 및 40군은 청천강 북안에서 8군의 주력을 향하여 육박하였다. 중공군의 팽덕회는 1개 야전군의 양익과 후방을 완전 포위하는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중공군이 8군의 우측방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돌파구를 형성하자 8군은 2사단을 군우리(軍隅里)로 철수시켜 북쪽과 동쪽에 방어선을 편성하고자 하였다. 이곳마저 돌파당하면 8군 주력부대의 퇴로가 차단당할 판국이었다. 8군의 주력부대가 청천강을 도하하여 철수한 것을 확인한 2사단은 터키 여단과 함께 철수를 개시하였다. 사단은 30일 아침 후일 ‘태형(笞刑)의 계곡’으로 알려지게 되는 군우리~순천(順川) 도로로 들어섰다. (인디안들은 비겁자를 처벌할 때 부족들이 두 줄로 늘어선 가운데를 지나가게 하여 가혹한 징치(懲治)를 가하였다-이것이 인디안 태형이다)
이때부터 기관총과 박격포를 배치한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2사단의 철수대열은 폭우와도 같은 집중사격을 받으면서 8km의 계곡을 빠져나가려고 사력을 다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사상자는 늘어가고 도로는 파괴된 전차, 차량들로 막혀 버리고 말았다. 급기야 도저히 부대를 지휘할 수 없게 된 사단장이 짚차를 버리고 도보로 철수할 수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다음날 새벽 4시에 끝난 태형장의 비극은 무려 3000여명의 손실과 중요 장비를 모두 유기하는 참변으로 막을 내렸다. 군우리의 비극은 미군 역사상 유례없는 참극이었다. 이는 적을 정확하게 파악하지도 못하면서 가볍게 본 최고 수뇌부 즉 맥아더와 워커가 초래한 것이었다. ‘태평양의 시저’ 맥아더의 신화는 이것으로 한반도의 山野에서 비참하게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