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26) 주코프-팽덕회vs 유엔군···’미니 세계대전’ 예고

한반도에 진입한 중공군을 통합지휘하기 위하여 항미원조지원군사령부(抗美援朝志援軍司令部, 중조연합사령부)가 설치되었다. 사령관에는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팽덕회, 부사령관에는 연안파인 북한 내무상 박일우가 임명되었다. 중조(中朝) 작전조정과 협조는 후일의 한미연합사령부와 비견될 정도로 잘 이루어졌다. 북한과 중공은 항일전쟁중 동북항일연군을 이루어 같이 싸웠고 6·25 이전 입북한 중공군 출신 한인이 3개 사단에 달하는 등, 문자 그대로 혈맹관계였고 특히 상부구조는 서로 익숙한 맹우였기 때문에 조정이 원활할 수밖에 없었다.

9월에 작성된 중공군의 원래 작전계획은, 6개 군으로 편성된 13병단은 수풍댐 이서(以西)로 기동하여 적유령산맥에서 유엔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2개 군은 수풍댐 이동(以東)으로 기동시켜 청천강 계곡을 타고 우회기동, 미 8군의 후방에 진출시킴으로써 청천강 북안으로 진출한 8군을 포위, 섬멸한 다음 일거에 평양을 탈취하려고 하였다. 동시에 3개 군으로 편성된 9병단은 중강진(中江鎭)으로 지향(指向), 함흥으로 진격시켜 10군단의 후방을 차단하여 포위 섬멸하고 원산을 탈취하려 하였다.

그러나 유엔군의 진격속도가 예상보다 빠르고 9병단의 주력부대가 산동(山東)에서 만주로 이동하지 못한 상황에서 개입을 서두르게 된 중공은 우선 가용한 13병단을 투입하고 그중 1개 군을 동부전선으로 기동시켜 10군단의 진격을 저지하고, 서부전선에서는 나머지 5개 군만 전개하여도 미8군의 북진공세를 저지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수송수단이라고는 철로수송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중공군이 한국진입에 이용한 경로는 봉천(奉天)에서 안동(安東)에 이르는 복선철로(複線鐵路)와 봉천에서 길림성을 우회하여 집안(輯安)에 이르는 단선철로(單線鐵路)였다. 入韓 후에는 순전히 도보행군이었다. 맥아더 장군이 북한의 척추를 이루고 있는 낭림산맥 지대를 회피하여 전선을 동부와 서부로 분할하였듯이 중공군도 이 험준한 지형은 버리고 그 양편으로 기동하였다.

13병단의 6개 군은 1차에 4개 군, 2차에 2개 군이 압록강을 도하하였다. 그중 39, 40군은 신의주로부터 산악접근로로 접어들어 대동강 상류~운산(雲山) 및 온정(溫井)으로 진출하고, 38군은 만포진~강계~희천을 잇는 청천강 계곡 접근로로 진출하였다. 조공임무를 띤 42개 군은 만포진~강계~장진호를 잇는 산악접근로로 기동하였다. 2차에 안동을 도하한 50군은 경의선을 따라 신의주~안주 축선으로, 66군은 신의주~구성~태천~용산동 방향으로 후속시킬 계획이었다.

중공군의 기동계획은 역삼각형의 양 정점(兩頂點)인 신의주와 만포진에서 한 정점인 군우리(軍隅里)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여 작전지역내에 있는 유엔군을 포위, 격파하고자 하는 웅대한 구상을 담고 있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일거에 전세를 역전시킨 구상이라고 한다면 팽덕회의 구상도 그만큼 컸다.

이 기동계획은 중국인에게 익숙하였다. 멀리는 고구려와 수당(隋·唐)의 쟁패(爭覇)이래, 가까이는 병자호란에서 청일전쟁에 이르기까지 호시탐탐 한반도를 노리는 중국의 전략가들에게 이 병요지지(兵要地誌)는 손바닥 보듯이 환했다. 반면, 유엔군에게는 1:50,000지도 하나뿐, 모든 것이 생소하였다. 전투의 승패를 가름하는 METT(임무, 적정, 지형과 기상, 가용전력) 요소 가운데 중공군은 지형과 기상, 정보에서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후방에서 대포위환(大包圍環)을 달성, 승승장구하던 독일군에 대해 반공(反攻)의 전단(戰端)을 연 쥬코프-팽덕회의 역전 드라마가 이제 펼쳐질 것이다.

한국전쟁은 브레들리가 말했듯 잘못된 전쟁이 아니었다. 가위 미니 세계대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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