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34) 가슴에 수류탄 2발 ‘리지웨이’

1950년 12월 29일 미 합참은 새로운 정책결정과 전략계획을 요구한 맥아더 장군에게 “유엔군의 전력보존에 유의하여 축차적인 방어작전을 수행하되, 일본방위에 대한 위협을 고려하여 한반도로부터 철수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최종적 기회를 사전에 결정하여야 한다. 단, 철수개시에 관한 지시는 이에 대한 귀하의 건의를 접수한 후 차후에 하달할 것“이라는 훈령을 하달하면서, 이에 덧붙여 ”그러나 유엔군이 치명적인 손실을 피할 수 있다면, 가능한 한 한반도의 일정선(一定線)에서 방어선을 확보하여 중공의 위신에 손상을 가하는 것이 미국의 국가 이익상 매우 중요하다‘고 부언하였다.

12월 30일 회신에서 맥아더 장군은 이에 대하여 극도의 불만을 표시하고, “만약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면 철수를 단행한다면 중공군의 침략위협은 보다 중요한 지역에 대하여 가중될 것이며 이로 인하여 자유세계는 보다 많은 희생이 요구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중공해안 봉쇄, 중공 본토내의 군수산업시설 폭격, 국부군의 한반도 파견 등’ 대중보복조치를 건의하였다.

맥아더의 회신은 워싱턴을 대경실색하게 만들었다. 이에 합참은 1월 9일 1) 중공에 대한 보복은 현 전선에만 국한하고 2)중공해안 봉쇄는 영국의 동의를 필요로 하며 3)국부군은 현재의 위치가 최선이며 4)중공이 한반도 밖에서 미국을 공격하지 않는 한, 중공 본토에 대한 폭격이나 공격은 불가하다는 종래의 지시를 반복하는 훈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대하여 맥아더 장군은 한반도에서의 전선유지와 일본방위의 두 가지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유엔군의 전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는 “유엔군의 작전수행에 전례 없는 제한이 부과되고 있는 현재의 여건 하에서 한국전선의 유지는 불가능하며 따라서 유엔군의 조속한 철수가 불가피할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면철수를 단행할 의도가 있느냐, 아니면 계속 한반도를 방위할 것이냐에 있을 뿐이다” 고 주장하였다. 이는 자신의 확전 주장을 수락하도록 하기 위해 한반도 전면철수를 내세워 압력을 가하면서, 최악의 경우 한반도로부터 철수를 단행하게 되었을 때에는 그 결과에 대한 최종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한 사전 포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현지 상황을 직접 파악하기 위해 1951년 1월 15일 한국전선을 방문한 콜린스 참모총장은 리지웨이의 8군이 전세를 수습하고 머지않아 공세로 이전할 수 있음을 합참에 보고하였다. 패닉상태에 빠졌다고 본 유엔군사령부보다 현지를 시찰하고 내린 참모총장의 판단이 전략의? 중심을 잡게 된 것이다. 8군은 1월 25일을 기하여 서부 및 중부전선에서 일련의 반격작전을 개시하여 적에게 최대한의 손실을 강요하면서 38도선까지 진격을 시도하였다.

리지웨이 장군은 ‘분쇄기식 전술’ 즉 축차적인 작전통제선을 설정하고 좌우 인접부대 간의 간격 없이 전면공격을 감행하되, 우세한 화력 및 기동력을 활용하여, 지역의 확보보다는 적을 살상하는데 중점을 둔 반격 작전을 계획하였다. 이리하여 8군은 1월 25일부터 Thunderbolt, Round-up, Killer, Rugged, 및 Dauntless 라고 명명된 단계별 반격작전을? 감행하였다.

2차대전 시 18공정군단으로 유럽 전장에서 용명을 날린 리지웨이 장군은 항상 앞가슴에 수류탄 두 개를 차고 다녀서 유명했다. 장군이라도 언제든 전투의 일선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30대 초반(백선엽 장군은 1920년생)으로서 위관장교로 일본군과 만주군에서 복무한 경험이 고작이었던 한국군 수뇌부에게 유럽을 유린한 독일군을 격파한 50대 중반의 역전의 미군? 효장(驍將)들은 존재, 그 자체가 든든한 힘이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