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국어·국사 교과서 글자 하나 수정도 신중해야”

3R, 즉 읽기(reading), 쓰기(writing), 산수(arithmetic)는 어느 나라에서든 초등교육의 기초다. 청소년들이 불과 10년 전에 나온 책을 읽기 난해해 하는 한국의 어문교육은 잘못된 것이다. 하기야 중국에서도 간자(簡字)로 교육받은 청소년들이 고문(古文)을 읽기 어려워하고 한국 관광객이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를 줄줄 읽어 내려가는 것을 보고 신기해 한다고 하니 위안이 된다고 할까?

우리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서기 1955년은 단기 4288년으로 소위 쌍8년이라고 하여 자유당의 부패가 자심(滋甚)해질 때다. 우리는 2학년 때부터 한자를 더듬더듬 해독하면서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5~6 학년 때에는 거의 신문을 해독할 수 있었고 더딘 아이들도 중학생이 되어서는 신문 읽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1960년대는 사상과 지성 보고(寶庫)인 <사상계>(思想界)를 고등학생도 읽었다. 이 모두가 오늘의 젊은이들에게는 그림의 떡은 아닐런지?

사회과목은 바이마르 헌법을 참조하여 제헌헌법을 기초한 유진오의 공민(公民)을 배웠는데 무엇보다도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기본에 대해 배웠다. 4·19혁명은 국토방위, 납세, 근로와 함께 교육을 국민의 4대 의무로 규정하며 전 국민이 보통교육을 받게 한 이승만 정부의 소산이다. 당시 초등학생은 헌법 전문(前文)을 외우는 것은 물론, 1장 총강, 2장 국민의 권리와 의무는 암기하였으며 103조로 되어 있는 헌법 전문(憲法 全文)을 암기한 학생도 있었다. 12살이면 충분히 이러한 지적의욕을 가질 수도 있는 나이이다. 영국의 제임스 밀은 아들 존 스튜어트 밀에게 각별한 기대를 가지고 조기교육을 시켰는데 밀의 자유론 등 불후의 작품은 20세 이전에 초고가 잡힌 것이다.

5·16이 일어나면서 헌법 전문(前文)에 이상한 문구들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특히 1972년 유신헌법은 제헌헌법을 중심으로 사고의 틀이 형성된 젊은이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때 한국적 민주주의의 분식에 동원된 학자들은 한태연 갈봉근 박일경 등이다. 정신문화연구원도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이에는 사학자 이선근 등이 앞장을 섰다. 홍문관 대제학의 권위를 갖던 서울대학교 총장이 한낱 문교부의 관료로 전락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국군의 이념적 지표가 된 것은 1968년 제정된 ‘군인복무규율’이다. 사관학교에 입교한 생도들은 군인복무규율을 모두 외었다. 특히 강령 10개항은 반드시 암송하여야만 했다. 국군의 이념에서 “국군은 대한민국의 헌법을 수호하고 자유와 독립을 보전하며 국가를 보위하기 위하여 국민의 자제로서 이루어진 국민의 군대이다”라고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이 군인복무규율은 이병도 박종홍 등 당대 석학의 자문을 받아 이재전 장군 등이 기초한 것이지만, 대통령령으로 반포된 것이니만큼 박정희의 작품으로 보아도 된다. 이러한 박정희가 4년 후 10월유신이라는 해괴한 굿판을 벌인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국가적 역사적 비극이다.

국어와 국사 교과서는 국가가 책임지고 만들어야 된다. 건국 초기 편수국장은 우리 말본의 기초를 확립한 외솔 최현배(崔鉉培)였다.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는 (한민족이라면 누구도 격앙(激昻)을 누를 수 없는)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로 시작되는 광복절 가사를 비롯한 4대 국경일 경축가사를 지었다. 가람 이병기(嘉藍 李秉岐)와 노산 이은상(鷺山 李殷相)은 많은 노랫말과 명문학교 교가의 가사를 지었다. 이들이 우리 말과 혼의? 원형(原型)과 기초(基礎)를 정립한 것이다.

국어와 국사 교과서는 탯줄과 같다. 일자일구(一字一句)의 수정도 헌법과 같이 신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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