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현스님의 즉문즉설]소동파 무릎 꿇린 승호대사 ” 내 기합소리가 몇근이나 되겠소?”
적벽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적벽부>(赤壁賦) 등으로 중국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동파(東坡)거사 소식(蘇軾, 1037~1101)은 “아무리 많은 글을 읽어도 율(律)을 읽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을 어렵게 하는데 쓰는 것은 읽지 않겠다는 ‘사람 중심’의 사고가 마음에 든다. 그러나 그도 한때는 어쭙잖은 자만심으로 고생한 적이 있었다. 서른네 살에 지방 태수로 부임해 가까이 있는 옥천사의 승호(承皓)대사를 찾았다. 인사를 나누며 처음 보는 까닭에 누구냐고 묻는 대사에게 소동파는 ‘칭가’(秤哥)라고 답한다. 칭은 무게를 다는 저울을 말하므로 “나는 사람 즉 당신의 실력의 무게, 인품의 무게를 다는 사람이오”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승호대사가 모르는 척 “아! 그런 성씨도 있나요?” 하면서 웃다가 갑자기 “야압~”하는 기합소리를 크게 질렀다. 마치 천둥소리와도 같이 큰 소리를 느닷없이 지르니 소동파는 혼이 빠지고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리고 승호대사가 물었다. “칭거사님! 방금 들은 그 소리는 몇 근이나 나가겠소?”
[아시아엔=무상법현(無相法顯) 스님 열린선원 원장]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다. 하고 싶은 일도 매우 많다. 그것들은 생각을 먹고 자라서, 생각을 따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번성하기도 하고 시들어서 ‘시나브로’ 또는 ‘느닷없이’ 죽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할 일도 손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혼자서도 하고, 둘이서도 하고, 여럿이 함께 해야 할 것들이다. 그것을 언제 해야 좋을까?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있다가 눈을 뜨자. 아주 꼭 필요한 만큼만 머뭇거리다가 일어나자. 그래도 허리는 펴고 세수를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래도 그렇지, 마음속에 부처님이 계신데 그렇게 꼭 불상과 눈을 마주하고, 절을 하면서 그 앞에서 조아려야만 하는 것인가?’ 이렇게 합리적인 이유를 대가면서 불자로서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있는 나에게 뭐라고 말할 것인가? 다른 이에게는 뭐라고 할 것인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모든 일에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선배스님인 신라시대의 원효(元曉, 617~686)대사께서는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고 날짜를 미루는 나에게 지청구하신다.
“오늘만…. 하다 보니 오늘이 없어지지 않아 악한 일 짓는 날이 많아지고, 내일이 오면…. 하다 보니 내일이 오지 않아 착한 일 짓는 날이 적어진다. 올 해만…. 하다 보니 올해가 계속되어 끝없이 헷갈리고, 내년에는…. 꼭…. 하다 보니 내년이 오지도 않아 깨달음에 나아가지 못하누나.”
부처가 되겠다고 하는 엄청나게도 커다란 꿈을 안고 출가한 이가 나라면 그럴 리가 없는 데도 그 꿈을 잊었는지, 아니면 꿈을 꾼 적도 없었는지 게으름만 피우고 있다. 그것을 아시고 천년이나 넘은 후배에게 입에서 단내 나도록 말씀하신다. 아니 더 나아가서는 무시무시하리만큼 협박으로도 들리는 말씀을 덧붙이신다.
“시간시간이 흘러서 하루가 잠깐이고, 하루하루가 흘러서 한달이 훌쩍 가고, 다달이 얼른 지나 한해가 홀연 가고, 연년이 문득 지나 죽음에 이르나니.”
곧 죽을 것인데 그 무엇을 망설이느라 결심을 하지 못하고 결행을 하지 않느냐는 준엄한 꾸짖음을 보내시는 게다. 한국의 승려라면 누구나 읽고 좋아하며 재가불자들도 좋아하는 말씀인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에 있는 가르침이다.
소동파 무릎꿇린 승호대사
적벽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적벽부>(赤壁賦) 등으로 중국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동파(東坡)거사 소식(蘇軾, 1037~1101)은 “아무리 많은 글을 읽어도 율(律)을 읽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을 어렵게 하는데 쓰는 것은 읽지 않겠다는 ‘사람 중심’의 사고가 마음에 든다. 그러나 그도 한때는 어쭙잖은 자만심으로 고생한 적이 있었다. 서른네 살에 지방 태수로 부임해 가까이 있는 옥천사의 승호(承皓)대사를 찾았다. 인사를 나누며 처음 보는 까닭에 누구냐고 묻는 대사에게 소동파는 ‘칭가’(秤哥)라고 답한다. 칭은 무게를 다는 저울을 말하므로 “나는 사람 즉 당신의 실력의 무게, 인품의 무게를 다는 사람이오”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승호대사가 모르는 척 “아! 그런 성씨도 있나요?” 하면서 웃다가 갑자기 “야압~”하는 기합소리를 크게 질렀다. 마치 천둥소리와도 같이 큰 소리를 느닷없이 지르니 소동파는 혼이 빠지고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리고 승호대사가 물었다. “칭거사님! 방금 들은 그 소리는 몇 근이나 나가겠소?”
소동파는 제법 많이 읽은 유불선의 전적과 과거에 급제한 실력만으로는 어렵다는 판단을 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날 승호대사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관아에 부임하면 근처에 있는 스님들을 찾아 겸손하게 가르침을 청했다. 강서성 강주에 부임했을 때 구강(九江)지방에 있는 동림사(東林寺)에서 선풍(禪風)을 드날리던 상총(常總, 1025~1091)선사에게도 가르침을 청했다. 그랬더니 상총선사는 대뜸 “그대는 어찌 무정(無情)설법은 듣지 않고 유정(有情)설법만 들으려 하시오?” 하는 것이었다. 정이 있고 없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많다.
일반적으로 좋아하는 마음을 정이라 해서 그것이 있으면 마음이 있는 즉 사람이라는 뜻이고, 그것이 없으면 동물이나 식물 혹은 광물이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상총선사의 말은 왜 사람의 설법만 들으려 하고 자연물의 설법은 듣지 않느냐는 뜻으로 읽는다. 그런데 다른 쪽에서 살펴본다면 정이 있는 존재는 애착이 남아있는 존재이고 따라서 어리석은 중생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반대인 정이 없는 존재는 애착을 없애버린 존재이고 자연히 어리석지 않은 즉 깨달은 부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소동파는 그 뜻을 짐작하기 어려워 서둘러 상총선사의 자리를 물러나오면서 그야말로 의심덩어리 화두가 가슴에 콱 박혀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폭포 곁을 지나는데 문뜩 쏟아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읊은 노래가 바로 “시냇물 소리는 부처님의 멋진 설법이니 산이 어찌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자체 즉 진리가 아니겠는가? 밤새 들은 무정설법을 누구에게 전해 줄 수 있을까?” 하고 읊었다는 것이 선의 문서들에 전한다.
소동파가 깨달은 소식(消息)도 다시 보면 내가 지금 여기에서 접하고 있는 모든 것이 바로 우주자연의 섭리이니 진리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야말로 부처님의 설법이다. 아니 부처님 그 자체다. 그런데 그것도 지금 여기에서 살펴야 알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 골똘하게 사유해야 깨달을 수 있다. 부처님도 끊임없이 살펴야 할 것은 지나간 과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ditthe va dhamme)라고 누누이 강조하셨다. 그래서 “지나간 것을 슬퍼하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동경하지 않으며, 현재에 얻은 것만으로 삶을 영위하는 사람에게 안색은 맑고 평온하다”고 ‘상윳따니까야’(samyutta nikaya) 등에서 말씀하였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도 이 글에서 벗어나 지금 함께하고 있는 모든 것들에게서 우러나오는 빛과 소리에 귀와 눈길을 주어보시라! 거기에 깨달음이 있을 것이다. 거기에 우주의 사랑이 함께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