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 “이웃종교와 만나 인사하고 밥먹으면, 그게 천국이고 극락이지요”
[아시아엔=법현스님 열린선원 원장] 7년 동안이나 가뭄이 들어 아무 것도 살아남지 않은 것 같은 사막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말라 비틀어져 도저히 살아날 것 같지 않았던 바위틈의 이끼도 비가 오면 어느새 푸릇푸릇 생기가 돋아나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지요. 고비사막이나 몽골의 사막화지대, 그리고 물이 점점 줄어들어 가는 사해(死海)의 모습에서도 안타까움을 살필 수 있지요.
그런데 제가 작년에 가서 심었던 나무들이 살아나서 조금씩이나마 푸르러지고 물을 간직하기 시작해 스러지던 호수들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몽골정부의 보고도 있었고, 우리나라의 TV프로그램에서도 방송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양노르솜’이라고 몽골말로 ‘호수 많은 동네’라는 뜻이라더군요. 900%의 물이 증발하다가 1% 정도의 물이 남아나기 시작했다니 얼핏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요?
하지만 900%가 증발하지 않고 더하여 1%가 남아나는 것이므로 901%의 물이 남아있는 것이니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유가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단체와 국가기관에서도 나무를 심었지만 다 말라죽고 호수는 점점 사라지고 13개나 있던 호수가 하나밖에, 그것도 물이 아주 적게 남아있는 상태로 있다는 것이 바양노르솜의 현주소입니다.
그런데 우리 NGO인 ‘푸른 아시아’와 ‘푸른 지구’ ‘호수연대’가 함께 하면서 변화가 일어난 겁니다. 자원봉사자들은 나무를 심으면서 현지인을 고용해서 관리하게 했지요. 우리 NGO들이 나무 살피는 방법과 비용을 지원해서 그들에게 이익이 돌아가도록 한 정책이 효과를 보기 시작한 것이랍니다.
2005년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열린 세계종교평화회의에 참석해서 이웃종교인들과 교류하고 세계평화에 기여할 종교인의 역할에 관해 연설하고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곳에 저는 한국 서울에 있는 북한산 태고사(太古寺)에서 담아간 흙을 사랑나무(love tree)에 섞고 올리브나무를 심었는데 ‘아시아의 대화’(Dialogue of Asia)에서 잘 가꾸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막 적셔 기화요초 피워내듯 2009년에는 활동하고 있는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종교간대화위원회에서 이슬람과의 대화순례를 위해 두바이, 레바론, 요르단, 시리아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무슬림 지도자들과 대화하고 이슬람, 그리스도교 성지를 순례하면서 페트라와 와디 럼 등의 유적과 공동체 근처를 살펴봤습니다. 정말 많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베두윈족의 텐트촌에 머물면서 보았던 사막 하늘의 총총히 빛나던 별들, 그리고 사람들 가까이에 푸른 눈을 빛내면서 다가오던 사막의 짐승들에게서 오히려 따스한 정이 느껴지더군요. KCRP에서는 정부 지원으로 그곳 대학병원들에서 이라크 내전 희생 어린이들을 치료하고, 의사들을 수련시켜 더 나은 치료기법을 익혀주기도 하였지요.
올 1월에는 이란 종교지도자들을 초대해서 국제 세미나를 열고, 5월에는 국내의 무슬림들과 이슬람 연구자들을 초빙해서 ‘이슬람, 함께하다’를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지요. 이슬람 이해 세미나는 6회째인데 처음 5년 동안은 ‘이슬람, 다가서다’라는 주제로 대화와 교류 가능성을 타진했습니다.
이제는 조금 더 성숙한 살핌을 위해 ‘다가서다’에서 ‘함께하다’로 바꿨는데 느낌이 어떻습니까? 매번 참석하면서 이 일이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 일인지 절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만나지 않아도 될 타종교 사람들을 왜 만나느냐?”는 비판적인 시각도 물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서로 만나다 보면 언젠가는 이해하지 못하던 사람들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요? 마치 몽골 바양노르솜에 나무가 몇 십 그루씩 자라나기 시작했듯, 7년 동안 가물었던 사막에 기화요초가 비를 맞고 피어나듯이, 그렇게 말입니다. 제가 열고 있는 열린선원은 아주 자그마한 포교원입니다. 참선(參禪)을 중심으로 수행, 전법하는 도량입니다. 50년이 넘은 재래시장 건물 한쪽에 자리하고 있지요.
입구에는 교회가 자리하고 있어서 늘 찬송가와 기도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오가는 사람들이 “열린선원 신도들은 찬송가 소리를 듣고 나서야 극락세계에 갈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한답니다. 저희도 작은 절이요, 그네들도 작은 교회입니다. 그래도 열심히 수행, 전법 하지요. 그런데 어느 날 기도회를 마치고 난 교회 신도들이 이야기를 나누자고 해서 함께 한 적이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제 승용차의 번호를 외우고 있더군요.
‘아! 감시하려고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결코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그분들이 저에게 좋은 느낌을 가졌기에 고마워서 관심을 가지다 보니 제 차 번호까지 기억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별스런 일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오고 가면서 목사님과 교회 성도들에게 인사를 나누는 정도였지요. 그리고 몇해 전 비바람이 몹시 불던 어느 날 새벽에 거리에 나가다 보니 십자가가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손으로 주워서 교회에 가지고 갈까 하다가 그냥 교회로 가서 문을 두드려 목사님을 찾았지요. 그리고 “성물(聖物)이기에 목사님께서 직접 다루시라고 가져왔다”고 하였더니 그 이야기를 성도들에게 한 모양입니다. 약간의 배려심을 본 것이겠지요.
비록 서로 다른 신앙관을 가졌다 할지라도 자꾸 만나고, 인사하고, 밥도 먹고, 기도도 함께 하면서 교류하면 서로를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어쩌면 남이 아니라 형제, 자매라는 느낌을 가지게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여러 종교들이 서로 어울려 있는데, ‘타종교’라 하지 않고 ‘이웃종교’라고 부릅니다. 이웃 종교의 형제자매 여러분 반갑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