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현스님의 동행] 모름지기 다섯 가지를 갖춰야 비구이다
불교계에는 나라와 국민을 위한 기원법회라는 형식의 행사가 있다. 이 법회는 대통령 내외와 정관계 인사들 및 불교계 종단의 총무 원장을 비롯한 수장들, 스님 및 재가불자 지도자들이 모여 담소도 나누고 나라와 국민을 위해 기도를 올리는 의미 있는 행사이다.
그런데 행사장에서 특이한 것이 하나 있다. 다른 불교 법회와는 달리 대통령 내외가 헤드테이블 한가운데 빛나는 의자에 앉고 그옆으로 약간 비켜서 불교계 대표인 종단협의회 회장이 앉고, 각 종단의 대표 등은 다시 그 옆으로 죽 늘어앉는다. 하지만 이는 격에 맞지 않는 처사인 것 같다. 한낱 자리 배치에 연연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적어도 불교계 주최의 기원법회 행사에는 불교계 대표가 중앙에 앉거나 정부 대표와 같이 앉아야 한다.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께서도 제자 가섭과 자리를 함께 앉지 않았는가. 또 실제로 그렇게 행사를 진행한 선례가 김대중 정부 때 있었다. 그리고 그런 행사장에서 대통령과 인사를 나누는 장면을 보면, 죽 늘어서서 고개를 많이 숙이는 모습이 일반적이다. 절집에서 대종사, 선사라고 일컬어지며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스님들도 대개 그런 모습들이다.
모름지기 수행자들은 뭇 중생들에게 자비로우면서도 잘난 이들 앞에서 더욱 당당해야 한다. 중국의 동산 양개(807~869) 선사가 말했듯이 수행자는 높은 이들에게 한없이 높고, 낮은 이들 앞에서 한없이 자기를 낮춰야 한다. 그것이 비구의 특성이다.
송나라의 고승 법운(1088~1158)이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교 용어를 중국어로 번역한 책인『번역명의』에는 ‘모름지기 다섯 가지를 갖춰야 비구’라는 뜻의 ‘필추초오덕(苾芻草五德)’이라는 말이 나온다. 필추는 서역에서 나는 아주 질기고도 부드러우며 얇게 펴지는 성질이 있는 풀이다. 마치 붓다의 제자인 비구들이 그 풀과 같은 특성을 지녔다 하여 불교 수행자를 필추라고도 부른다. 『번역명의』에 나오는 ‘히말라야의 향기로운 풀’인 필푸는 다섯가지의 덕성이 있다. 비구 또한 그와 같은 덕을 갖추어야 한다.
비구는 생산 활동을 하지 않으므로 남에게 음식물과 옷가지를 벌어서 먹고 추위와 더위를 가리기 때문에 ‘빌어먹는 이乞士’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요즘에는 ‘하루라도 일하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 一日不作 一日不食’는 말을 수행자의 본분사로 여기고 금과옥조처럼 새기기도 한다. 하지만 초기불교에서는 비구의 하루 일과가 먹고 자는 시간 외에는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聞), 조용한 곳에 홀로 앉아 골똘히 사유(思)했기 때문에 생산 활동은 오히려 파계 행위라고 여겼다. 시대와 사회의 흐름에 따라 수행의 덕목도 바뀌어가지만 근본 의미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필추의 다섯가지 특징을 비구의 덕성으로 비교해 보면 그 의미가 각별하다. 첫째는 부드럽다. 부드럽다는 것은 몸과 말과 뜻의 세 가지 업의 거침을 능히 절복시키는 것과 같다. 둘째는 얇게 펴면 널따란 천이 된다. 그것은 비구가 가르침을 전해 중생을 제도함이 끊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셋째는 향내를 멀리서도 맡을 수 있다. 비구가 계를 잘 지킨 공덕의 향내가 대중에게까지 퍼진다는 것과 같다. 넷째는 아픔을 치료한다. 이는 능히 번뇌의 독한 고통을 끊는다는 것과 같다. 다섯째는 햇볕을 등지지 않는다. 이를 비유하면 비구가 바른 견해(正見)와 바른 생각(正思惟)으로 늘 부처님의 지혜를 지향하고 어긋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처럼 비구의 덕성은 생사의 파도를 넘기 위해서는 부드러운 풀의 속살처럼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업을 정화하면서도, 속에 심이 있는 것처럼 악행에 대항하는 힘은 질겨야 한다. 또한 어느 한존재라도 포기하거나 편애하지 않고 넓게 펼쳐지는 풀처럼 원만해야 한다. 게다가 맑고 향기롭게 산 삶의 자취가 널리 퍼져야 하며, 나의 번뇌와 남의 고통을 지혜와 자비로써 해결하고, 햇볕처럼 만병의 근원을 없애고 뭇 생명의 원천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머리를 깎았다 할지라도 지녀야 할 다섯 가지 덕성을 제대로 지니지 못했다면 올바른 수행자라 할 수 없다. 머리를 기르고 속가에 살지라도 이 같은 덕성을 지니고 산다면 비구니와 같거나 오히려 더 나은 수행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몸의 출가(出家)와 마음의 출가(心出家)의 구분이 생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