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문즉설 법현스님의 동행] 아빠, 아버지, 아버님···당신이 너무 그립습니다

스승이요 벗인 당신을 불러봅니다
[아시아엔=법현스님 열린선원 원장] 내 고향은 전남 화순군 남면 검산리 산골마을이다. 산길을 지나 마을 몇 개 너머로 어머니가 어린 시절을 보내신 외갓집이 있었다. 이바지 가시는 어머니를 따라 외가에 갔을 적 이야기다. 정이월이 다 지나갈 무렵이라 날씨는 쌀쌀했지만 어머니를 따라가는 것도 그렇고 엿이며 고구마, 곶감이며, 가래떡에 찍어 먹는 조청 맛도 추억으로 남아 있어 설레는 맘으로 따라갔다. 그런데 외갓집에 도착해서 어른들께 인사드리고 맛있는 것도 얻어먹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복잡한 문제가 생겼다. 그 시절은 다들 그렇듯이 방이 많지 않아서 한 방에 여럿이 끼어 자야 했다. 잠자리에 들어 양말을 벗다가 슬그머니 다시 신어야 했다.

아뿔싸! 발이 글쎄 “까마귀 사촌은 저리 가라”가 되어 있는 거였다. 저녁마다 씻어야 하는데 지금처럼 따뜻한 물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발 씻는 일이 여간 귀찮은 게 아니던 시절이다. 그래서 추운 겨울방학을 지내느라 발이 새까매진 것을 그제야 발견한 것이다. 누가 볼 새라 다시 양말을 신고 잠을 청하는 나에게 그야말로 화두(話頭)가 잡혔다. ‘어떻게 남모르게 깨끗이 씻는다?’

다음 날 점심 먹고 외갓집 앞을 흐르는 개울가에 나갔더니 동네 아주머니들이 겨울을 지나오는 봄물에 빨래하러 나와 있었다. 아주머니들의 걱정하는 소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 발 저 발 담그면서 한나절 물에서 놀았다. 해질녘이 되어서 미끌거리고 간질거리는 발 감각을 안고서 고무신 안에 들어있는 양말을 살짝 벗어내렸다. 그랬더니 웬만한 때들은 다 물을 따라 가버리고 그야말로 몽글거리는 돌멩이로 조금만 문질러도 다 벗겨질 때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마음 속으로 환호를 하며 나머지 때를 씻었다. 그런 뒤에 외갓집으로 달려가서 큰소리로 말했다.

“외할머니! 발 씻게 물 주세요.” 외할머니는 사정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우리 손주 착하구나” 하시면서 기르고 있는 소에게 먹이로 줄 소죽 쑨 따뜻한 물을 한 대야 주셨다. 자랑스럽게 발을 씻고서 그날 밤은 양말을 벗고 편히 잘 수 있었다.

아무도 보진 못했지만 스스로는 알고 있던 발의 때처럼 내 마음에 낀 때를 바라보며 사는 것이 수행의 삶이다. 얼음장 밑으로 맑게 흐르는 냇물을 생각하면서 가끔은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맑디맑은 물과 양말 속의 발을 비교해 본다.

몇 년 전 <좋은 생각>이라는 잡지에 게재한 글이다. 글이 실리고 얼마 되지 않아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도대체 누구신데 고향 이야기를 늘어놓았느냐”며 묻는 분은 화순농협 지사에 근무하는 분이었다. 필자와 통화하면서 “아무개 어르신 아드님이냐”며 나의 속가 아버지를 말씀하셨다. 그 분은 마을에서 아버지와 아주 친했던 두 분의 동갑내기 벗 가운데 한 분의 동생이었다. 이번에 화순 천운농협 조합장에 무투표로 재선된 깔끔한 분인데 내 친한 벗의 작은 아버지 박판석님이다. 그 덕에 광주교육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박남기 벗도 수십 년 만에 만나서 지금까지 교우를 잘하고 있다.

붓다 가르침 기록한 아난다처럼
나의 아버지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했지만 슬기로운 분이어서 나를 가르치려고 객지생활을 오래 하셨다. 끝내 병고로 일찍 돌아가셔서 ‘출가수행자로서 나의 길’을 가는 모습을 얼마 보지 못하셨다. 언젠가 ‘부처님오신 날과 아버지의 추억’이라는 글로 소개하기도 하였다. 대개의 분들은 어머니의 사랑을 지극히 생각해서 어머니를 떠올리면 눈시울을 붉힌다. 그런데 나는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셔서 그런지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생각할 때 더 가슴이 저민다. 어머니 환갑잔치를 절에서 해드렸는데 오신 분들께 인사하며 아버지 얘기를 꺼내다 목이 메어 이야기를 잇지 못한 일이 있었다. 함께 한 동생들마저 “하필 잔칫날 아버지 얘기 꺼내 눈물이 핑 돌게 하느냐”고 했다.
부처님 제자 가운데 가르침을 잘 듣고 제대로 이해하며 제일 잘 기억해내 총지제일(摠持第一)이라는 칭찬을 들은 제자가 있다. 아난다(Ananda)가 바로 그였다. 그는 붓다의 가르침을 모두 기억해서 뒤에 붓다가 열반(涅槃)에 든 뒤 붓다의 평생 가르침을 암송(暗誦)했다. 오늘날 우리가 붓다의 가르침을 편하게 읽고 듣게 된 것은 아난다의 덕이라고 한다. 경전의 첫머리에 “이와 같이 나는 들었습니다”(如是我聞, evam me sutam)라는 문장이 나온다. 여기에서 나는 ‘아난다’이다. 이와 같이 아난다가 들었다는 것은 그 말이 정말 붓다가 설했다는 증거로 쓰이는 말이다. 아난다가 붓다께 여쭈었다.

“좋은 벗을 만난 것은 청정범행(淸淨梵行)의 절반이지요?” 붓다가 아난다에게 대답하였다. “그런 소리 마시게. 좋은 벗을 만나는 것은 청정범행의 전부일세.” <절반경>(Upaddhasutta)에 나오는 말이다.

청정범행은 깨끗한 하늘의 행이라는 뜻으로 붓다가 되는 수행을 의미한다. 좋은 벗을 만나는 것이 절반쯤은 되리라고 생각한 아난다의 질문에 절반이 아니라 전부라고 답한 붓다의 생각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끼리끼리 산다는 말처럼 좋은 벗을 만나면 좋은 공부를 시작하고 마침내는 맑고 향기로운 삶, 지속이 가능한 행복인 열반(Nirvana)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일가는 벗은 스승이다. 아버지는 벗이요, 그중에서도 제일가는 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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