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이런 판사들이 있어 세상은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간다
오랫동안 법관 생활을 한 친구가 바닷가 나의 집을 찾아왔다. 반듯한 성격을 가진 그와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같이 다녔다. 일선에서 물러났는데도 그는 윤석열 대통령의 체포영장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영장을 발부하는데 담당 법관이 왜 그렇게 고민한다고 하면서 시간을 끄는지 몰라. 소신껏 당당하게 해야지”
그는 후배 법관들의 태도를 답답하게 느끼는 것 같았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텔리비전 뉴스에 그의 얼굴이 크게 등장했던 한 장면이 불쑥 떠올랐다.
김영삼 대통령이 시사저널 기자를 고소한 사건이었다. 내용은 희미하지만 검찰이 외국에 갔다오는 그를 공항에서 체포하고 구속영장을 신청한 사건이었다. 살아있는 권력인 대통령이 처벌을 원해 고소한 사건이라면 밑에서 알아서 기어야 하는 게 당시의 분위기였다. 그런 경우 청와대에서 대법원장이나 담당 법원장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해 주는 게 이면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사법부로서는 부담이 되는 사건이었다. 영장담당 판사였던 친구는 그는 기자에게 악의가 없었다는 사유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어떤 면으로는 무서운 대통령의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다. 나는 그에게 잘했다고 칭찬해주었다.
이따금씩 그는 그가 인천법원 판사를 할 때 다루었던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일부 조각을 내게 얘기를 하곤 했다. 판사를 하면서 그의 뇌리에 깊이 박힌 사건인 것 같았다.
1986년 당시 서울대 여대생이 다른 사람의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공장에 들어가 노동을 했다. 그 시절 의식이 깨인 대학생들은 노동자의 삶을 공감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 손학규, 유시민 등 지금의 정치인들이 젊은 시절 그런 경험을 많이 했다. 소설가 황석영씨도 젊은 시절 공장에 들어가 손학규씨와 함께 닭장 같은 집에서 같이 하숙을 했다고 했다. 당시 군사정권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색출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기도 했다.
당시 인천법원 판사였던 친구는 공장에 들어가 일한 서울대 여대생의 주민등록증 위조사건만을 심리하고 있었다. 사건 자체는 관대한 처벌로 석방 시킬 사안이었다. 그런데 그의 법정에서 갑자기 성고문이 폭로되었다.
나는 40년 가까이 변호사를 하면서 고문 사실을 여러 번 폭로했었다. 인권 문제를 고발하는 변호사에게 법정은 성스러운 성전이다. 세상의 불법과 불의를 법률 문제화하고 사회에 알리는 가장 좋은 장소라고 할까. 진정성을 인정받기 쉽고 또 기자들도 법정에서 나온 얘기들은 근거가 확실하기 때문이다. 여론의 햇볕을 쬐어야 고문의 병균은 사라진다. 반면 권력은 문제가 발생하면 어떻게든 사실을 은폐하고 왜곡시키려고 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입을 틀어막고 언론을 현혹시키려고 했다. 판사들은 법정에서 인권 문제가 폭로되는 걸 달가와 하지 않았다. 귀를 기울이면 골치 아프고 부담이 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옷만 벗겨 보면 고문당한 상황을 알 수 있는데도 외면하는 경우가 많았다.
부천서의 형사가 일으킨 사건은 그런 면에서 세상에 나타나기 힘든 사건이었다. 한밤 중 전등도 켜지 않은 어두침침한 조사실에서 형사가 조사를 받던 서울대 여대생의 옷을 벗기고 성고문을 한 사건이었다. 여대생은 수치를 무릅쓰고 그 사실을 알렸다. 정권은 사실을 즉각 부인하고 담당 형사는 서울대 여대생을 무고죄로 고소했다. 검찰은 운동권 여학생의 교활한 공작이라고 언론 플레이를 했다. 정권의 도덕성에 불이 붙을 인화성 짙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건이 법정에서 폭로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원칙과는 다른 우리 사법 시스템의 어두운 이면 때문이었다. 친구는 그 법정에서 여대생을 심리하고 있던 판사 중의 한명이었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 법정에서 군사정권을 몰아붙일 핵폭탄이 터졌던 거야? 그 시절은 권력이 입을 틀어막고 법원에도 압력을 가하던 시절 아니야? 주민등록증 위조를 심리하면 성고문과도 연관성이 없고 말이지.”
법정이 아니었다면 불씨가 일어나지 못하고 그냥 사그러 들었을지도 몰랐다.
“어느 날 조영래 변호사와 조갑제 기자가 나를 찾아와 성고문 내용을 말해주면서 법정에서 폭로하게 해달라는 거야. 얘기를 듣고 나도 분노했지. 그런 일이 없다며 언론플레이를 하는 권력이 얼마나 졸렬해? 내가 적극 동조하기로 하고 재판부의 다른 판사들을 설득했어. 심리하고 있는 사건과 직접 연관성이 없더라도 피고인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진술을 할 권리가 있어. 그 조항을 폭로의 근거로 삼기로 했지. 재판을 하는 날 법대에서 내려다보니까 대한민국 인권변호사들이 총 출동했더라구. 법정이 좁아서 그런지 젊은 박원순 변호사는 뒤쪽 문 앞에 서 있고 말이야. 기자들이 꽉 차 있었지. 서울대 여대생이 당한 사실을 폭로하니까 난리가 난 거야. 기자들이 전화로 본사 데스크에 송고하느라고 불이 나더라구. 공중전화를 쓰지 못한 기자들이 판사실로 와서 전화를 잠시 쓰게 해달라고 하더라구. 판사전화를 빌려줬지. 송고하는 걸 옆에서 들으니까 정말 핵심을 잘 파악해서 요약한 내용이더라구. 그 사건이 정치적 소용돌이가 되어 군사 정권을 코너로 몰았는데 우리 재판부에 꽤나 압력이 들어왔었어.”
법정은 불의를 폭로하기 좋은 성스러운 장소다. 친구 같은 좋은 판사들이 그 성전의 제사장이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