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대통령이 왕인가?
비상계엄을 선포했던 윤석열 대통령이 무력화되고 나락으로 떨어진 것 같다. 내 눈에 보이는 그의 모습은 당당한 패장이 아니고 그냥 굴에 틀어 박혀 있는 느낌이랄까. 나는 대통령 직속 조직에서 일한 적이 있다. 대통령 가까이서 그 이면을 볼 수 있었다. 대통령이 되면 왕이 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석에서 왕 앞에 있는 국무위원들을 본 적이 있다. 주인 앞에 엎드려 눈치 살피는 개를 닮았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나는 현장에서 그렇게 느꼈다. 아래 것들이 어떤지를 모르는 왕의 모습도 본 적이 있다.
대통령이 겨울 어느 날 얼어붙은 골프장에서 개인골프를 즐기는 걸 가까운 곳에서 관찰한 적이 있다. 땅에 떨어진 공을 주워주는 청와대 직원이 있었다. 허리를 굽히기 싫으면 왜 굳이 골프를 치는지 의문이었다. 경호원들 하소연도 직접 들었다. 골프 치는 대통령 근처의 나무 뒤에 숨어서 몇 시간을 가만히 서 있으면 온몸이 고드름같이 얼어붙는다고 했다. 공식적으로 어쩔 수 없는 외국 원수와의 골프모임도 아니었다.
왕관을 쓰면 사람이 달라지는 것 같다. 대통령뿐 아니라 그 가족도 왕족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대통령 임기가 끝난 후였다. 나는 왕족의 한 사람에게 대통령이 될 때 ‘보통사람’을 캐치 프레이즈로 했으면 평민으로 돌아가야 할 게 아니냐고 물었다. 그들은 내게 평민으로 돌아가기 힘들다고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비서실장이던 유승민 의원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했던 말의 의미를 나는 공감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뇌물죄가 심리되고 있을 때였다. 나는 대통령에게 뇌물을 주었다고 기소된 국정원장의 변호인이었다. 뇌물죄는 주는 자와 받는 자 둘만 아는 은밀한 범죄였다. 나는 박근혜 대통령을 증인으로 신청했다. 나의 법적 권리였다. 나는 신문할 자격이 있고 박근혜라는 증인은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증인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 재판장은 참석하지 않으실 거라고, 알아서 기는 것 같았다. 서면으로 신문하고 감옥 안에서 글로 대답을 써보내기로 결정이 났다. 나는 나의 생각과 묻고 싶은 말을 써 보냈다. 얼마 후 대통령 비서실장을 했던 분이 내게 “어떻게 지존에게 그럴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지존이란 임금이란 소리였다.
화가 난 나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저는 그 분을 제 나이 또래의 여성으로 볼 뿐입니다.”
대통령 근처의 사람들은 자신들 스스로를 신하로 생각했다.
자유민주주의는 개개인의 존엄과 가치 그리고 자유를 기반으로 하면서 공동체가 선과 정의, 공정을 추구하는 것이다. 나는 헌법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그런 가치를 읽고 또 읽었었다. 대통령은 그런 헌법정신을 핏속에 녹이고 지켜야 하는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나 공정한 기회를 부여하되 그 결과를 인정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현실은 아직도 봉건사회의 의식 속에서 머물고 있는 것 같다.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한 박근혜 대통령의 변호사 모습도 가련한 여왕을 모시는 신하의 의식이 엿보였다.
명망 있는 판사로 알려져 있던 이회창씨가 이런 말을 한 걸 그의 인터뷰 기사에서 봤다.
“1993년 대통령 취임식장을 보니까 단상의 자리가 대통령 내외 중심으로 너무 화사하게 꾸며져 있어 민주화시대와는 안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김영삼 대통령에게 그 얘기를 했죠. 맞장구를 쳐줄 줄 알았더니 ‘뭐 그런 얘기를 하느냐’는 뚱한 표정이었습니다.”
이회창씨는 대통령들이 자신이 용이 됐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더라고 했다. 대통령은 자기 손안에 있는 모든 권력으로 나라를 장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주위에서 바른 소리와 쓴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에게 대든다고 생각하면서 그 입을 틀어막고 싶어 하고 그게 안되면 자기 귀를 닫는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왕관을 쓴 후 사람이 완전히 달라진 것은 아닐까. 그의 친구나 상관이었던 사람들 그리고 그에게 조언을 하던 스승의 말을 들어보면 그런 것 같다. 더 이상 말을 하면 척질 적 같아 입을 닫았다고 내게 말해 주었다.
요즘 정치판이 진흙탕이 피어오르는 물이다. 이런 때 수면에 연꽃이 피어날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라가 어지럽고 침략을 당할 때 이순신 장군같은 일류가 등장했다. 일류정치인도 난국에 등장한다고 한다. 잘산다고 좋은 나라가 아닐 것이다. 핵이 있다고 강한 나라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개개의 인간을 귀중하게 여기는 로크나 루소의 철학이 있고 영원한 진리를 추구하는 단테의 시가 있어야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헤겔의 말처럼 민주주의는 왕을 두들겨 패는 과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