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그분한테서 온 ‘시간’이란 선물
나는 변호사를 시간을 파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젊은 날 내게 주어진 시간은 무진장인 것 같았다. 시간은 돈 같이 저장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강물같이 그냥 흘러가 버리는 것이었다. 아껴도 묶어놓을 수 없는 것이라면 공짜로 인심이나 쓰자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아버지 나이이던 스승 변호사의 행동은 달랐다. 내가 젊었던 시절은 도제식으로 변호사 업무를 배웠다. 내게 변호사 일을 가르쳐 주던 그분은 조용한 성격의 학자 같은 분이었다. 판사를 하다가 권력의 압력에 저항해서 사표를 내고 나온 올곧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선생인 그가 내가 배워야 할 판례를 먼저 찾아놓았다가 전해주기도 했다. 그런 그분의 특이한 행동이 있었다. 그는 인격을 믿는 사람이 아니면 절대 만나지 않았다. 아날로그 시대인 그때는 변호사 쇼핑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기저기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다니면서 묻고 또 묻는 그런 부류였다. 많은 변호사들이 사건 하나 맡으려고 입품을 팔고 시간만 빼앗겼다는 소리를 했다.
스승 변호사는 시간을 빼앗기는 게 싫은 것 같았다. 박절할 정도로 문을 넘어 들어오려는 사람을 거절하는 모습이었다. 노인과 젊은이였던 나는 시간에 대한 관념이 달랐다. 내게는 스승 변호사가 불쌍한 사람들에게 시간 한 조각, 지식 한 조각 내주지 않으려는 인색한 노인으로 보였다. 그때 나는 시간을 묶어놓고 쓰고 매 놓은 인생처럼 현실이 영원한 것으로 생각했었다.
나는 사람들 얘기를 끝도 없이 들어주었다. 그들은 법률 상담을 하지 않고 자기들의 인생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대부분이 사회의 시궁창 속에서 일어나는 지저분하고 악취 나는 얘기들이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인 장발장 같은 좋은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다.
영원할 줄 알았던 젊음이 어느 날 소리도 없이 증발하고 나도 스승 변호사 같이 노인이 됐다. 서리가 하얗게 내린 머리를 들고 예전에 써두었던 일기들을 보니까 고약한 악취가 진동한다. 잔머리를 굴린 수 많은 거짓말들과 탐욕의 비린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기주의자들이 스며 들어와 쥐같이 나의 시간 들을 갉아먹은 걸 이제야 깨닫는다.
‘나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지?’ 하는 생각이 든다. 인생은 출발과 동시에 흐르는 시간의 강물이었다. 끝나는 그 순간까지 정체가 있을 수 없다.
대학을 갈 때까지는 입시 강박증에 시간은 나의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고시 공부하던 긴 시간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물론 현실에서는 시간이 있었다. 사실 공부보다 논 시간이 더 많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박에 눌린 정신 속에서 나의 시간은 없었던 것 같다.
사회생활 속에서도 나는 미래라는 관념 속에서 허상을 잡기 위해 현재를 지워버리곤 했다. 조직의 회의나 무의미한 행사에 동원되어 시간을 빼앗겼다. 쳇바퀴같이 돌아가는 일상과 습관에 매달린 채 시간의 강물 위를 표류하고 있었다. 텔레비전이나 신문, 인터넷도 시간 도둑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너무 바빠”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시간의 강물은 어느새 나를 넓은 강의 하구로 데리고 왔다. 넓은 바다를 앞두고 나는 이제야 생각한다. 나는 시간을 잘 살아온 것일까. 내게 시간은 무엇이었지? 생각해 보면 시간이란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준 선물이 아니었을까. 부자라도 돈을 써서 남들의 두 배 세 배를 살지는 못한다. 우리는 모두 어느 날 갑자기 시간의 강을 벗어나 무한의 바다로 진입한다. 순간 인생 시계바늘은 정지한다.
그분의 선물이었던 시간을 잃어버렸던 건 아니었을까. 고달픈 인생을 하루하루 이어간다고 생각한 때도 있었다. 인생 열차의 종착역에 빨리 도착해 내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 늙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인생을 재촉하는 마음이었다. 그런 삶은 인생 전체를 잃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늦었지만 남아있는 시간들을 음미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오는 손자 손녀 아들 딸을 데리고 시골의 작은 고기 집 탁자에 둘러앉아 먹고 마신다. 시간 사용의 우선순위가 가족인 걸 젊어서는 몰랐다. 먼 길을 찾아온 친구들과 덕담을 나누면서 즐긴다. 나의 시간을 나누어 주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이제야 안다. 노을 지는 저녁 바다의 신비로운 색조를 보면서 이런 시간들이 그분의 선물인 걸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