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전두환과 윤석열, 어떻게 다른가…”책임은 구체적·실제적으로 지는 것”

나는 28년 전 전두환 노태우의 군사 반란을 재판하는 법정에 있었다. 검사가 전두환 피고인에게 물었다.
“전두환 피고인 12월12일 병력을 동원했는데 무슨 목적이었습니까?”
“합동수사본부장으로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의 공범혐의가 있는 육군 참모총장을 체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상대방은 막강한 계엄사령관이었는데 어떻습니까? 다른 보신책을 강구해 놓았습니까?”
“검사님은 상대방이 강할 경우 보신책을 강구하면서 수사합니까? 저는 원래 머리가 나빠서 보신책 같은 걸 착안하지 못합니다. 그랬기 때문에 용감하게 덤빈 거 아닙니까?”
“왜 시점이 12월12일 이었습니까? 그 다음 날 개각이 있을 예정이고 인사이동 때문에 그랬던 거 아닙니까?”
“제가 노름은 잘 못합니다만 외우기 쉬운 숫자나 짝수를 좋아합니다. 월남에서 작전을 할 때도 외우기 쉬운 4월4일 같은 짝수를 잡았고 또 대통령 취임 때도 3월3일로 했습니다. 그래서 12월 12일로 잡은 겁니다. 복잡하게 계산하고 한 거 아닙니다. 어쨌든 그날 있었던 일의 모든 책임은 저에게 있습니다.”
“그날 병력이 출동하고 교전 상태까지 간 원인은 뭐라고 생각합니까?”
“내가 계엄사령관을 체포해 오니까 그날 저녁 수경사령관이 제가 있는 곳으로 포격을 하라고 명령했어요. 그 포병단에는 토우미사일까지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있는 경복궁쪽을 향해 포를 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청와대와 중앙청, 정부종합청사가 있는 지역이 불바다가 되고 말죠. 포병단장이 너무 엄청난 명령이라 듣지 않았습니다. 수경사령관은 저를 사살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지가 무슨 권한으로 나를 사살합니까? 지나놓고 보니까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때 무모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여하튼 대통령의 재가로서 모든 게 끝난 거 아닙니까? 대통령의 명령에 따른 겁니다.”
그날 이후 권력은 신군부로 넘어간 셈이다. 군사반란을 심리하는 법정에서는 5.17 비상계엄 확대에 대한 신문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검사가 12.12 군사반란의 기획자이자 정국을 주도했다고 알려진 허화평에게 물었다.
“비상계엄의 요건은 전시 또는 그에 준하는 사변이나 적의 포위공격이 있을 때 발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5월17일 당시 비상계엄의 요건이 있었다고 봅니까?”
“글쎄요. 비상계엄의 요건을 누가 판단하느냐도 시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거 아니겠습니까? 죄인이 되어 재판을 받는 지금은 법과 국민 여론이 그 요건을 심사하는 시대고 계엄이 선포된 당시는 대통령을 비롯한 정권의 주체들이 상황을 판단한 것 아니겠습니까? 어느 경우나 권력의 주체와 그 반대세력은 상황에 대한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재야 세력은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총리의 퇴진을 일방적으로 요구했습니다. 대통령과 정부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는 경우 전국적으로 시위를 하겠다고 최후 통첩을 보냈습니다. 정권의 선택여지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을 우리는 위기로 봤습니다. 물론 재야 세력은 위기가 없던 것으로 봤지만 말입니다.”
그 후 45년 만에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회의 즉각적인 계엄해제 의결로 비상계엄은 150분만에 끝이 났다. 계엄법상 국회의 사후 통제 규정을 만들어 두었던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사과를 하는 담화에서 절박감에 비상계엄을 발동했다고 그 동기를 말했다.
병력을 출동시킨 국방부 장관이 긴급체포 됐고 관련된 특전사령관, 방첩사령관, 수방사령관 등에 대한 수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군사반란죄로 사형선고를 받은 신군부 군인들의 태도와 지금의 군인들 태도가 많이 다른 것 같다. 방송 인터뷰를 하고 국회에 출석해서 변명하고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해 하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앞으로 비상계엄의 판단 주체가 법원과 여론으로 넘어갈 것 같다. 비상계엄이 불뚝하는 성질을 가진 대통령에 의해 남용되지 않도록 합리적이고 구체적인 기준과 절차를 만들어 두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