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나는 운동권의 언더였어요”

“저는 뼈저리게 깨달았어요. 그동안 제가 가졌던 관념이 공허한 추상이었던 것을요. 감상적으로 대중이라는 허상을 동정했던 거죠. 저는 추상을 좇다가 추상이 되어 버렸어요.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피라미드 같은 세상 구조의 어디나 선인이나 악인이 섞여 있는 거죠. 특정계급이나 특정한 한 사람만이 악인으로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게 아니었어요. 사람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자기에게 맞는 일을 하고 살아야 되는 걸 이제야 알았어요.”(중략) 나(필자-엄상익 변호사)는 심리적 내전을 종식시키려면 사람들의 시선이 좌나 우가 아니라 위를 향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하늘에서 가진 것에 만족하는 마음, 작은 것에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만나 같이 내려오는 것을 받아먹어야 한다는 생각이다.(본문에서)

며칠 전 민주당의 이재명 대표가 한 유튜브 방송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었다. “지금 이 나라는 심리적 내전을 치르고 있어요. 아마 손에 무기를 들려주면 큰 일이 날 겁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만나면 상대방이 좌파인가 우파인가를 먼저 파악하려고 한다. 좌파를 흔히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해 왔다. 1980년대 운동권에서는 맑스 레닌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도 있었고 북의 주체사상을 따르는 사람도 있었다. 좌파란 이념적 지향이 그런 것인가.

오늘은 80년대 운동권의 언더 서클에 있던 한 여성이 내게 하던 절절한 얘기가 기억의 밑바닥에서 떠오른다. 그녀가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부자로 사는 게 미안하기도 하고 부끄러웠어요. 학교에서 아이들이 국산 모나미 물감도 사지 못할 때 저는 외제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죠. 다른 아이들이 판잣집에 살 때 저는 양옥집에서 살았어요. 풀장에 매일 수영하러 다니기도하구요. 저는 예쁘다는 소리도 듣고 공부도 잘했어요. SKY대 아니면 학교가 아닌 걸로 알았으니까요. 당연히 명문대 정치외교과로 들어갔어요. 그리고 자연스럽게 운동권으로 들어가게 됐죠. 제가 사랑한 남자가 운동권의 지도부였으니까요. 민주화투쟁을 하는 그가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 없었어요. 저는 핵심 언더서클에서 공산주의자가 됐어요.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의 일을 목숨 걸고 도왔죠.”

젊은 시절 공산주의자였다는 그녀의 중년 모습은 그리 행복해 보이는 것 같지 않았다. 초췌해 보이고 궁핍의 기운이 돌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그녀는 빈민 속으로 들어가 운동을 계속했다고 했다. 그녀가 당시의 경험을 이렇게 얘기했다.

“원당의 빈민촌 철거될 집에서 어린 아들하고 월세 25만원을 내고 살았어요. 영하 10도 아래로 떨어지는 겨울에 고장 난 보일러를 고치지 못하고 그냥 참고 살았죠. 세상의 밑바닥으로 떨어져 보니까 안보이던 게 보이더라구요. 가난하고 불쌍한 인민대중이 아니더라구요. 가난하면서 막가는 악질도 봤어요. 힘들게 사는 아저씨 부부를 동정했더니 그 아저씨가 노골적으로 날 좋아하는 거예요. 밤중에 강간하러 오기도 하구요. 빈민들 중에는 정부 돈으로 살게 되니까 자기들 처지를 모르는 사람도 많았어요. 법이 뭔지도 모르고 시위를 해서 부자들의 땅을 빼앗자고 하더라구요. 그 땅에 아파트를 지어서 우리도 부자가 되어 보자고 하더라구요. 저는 뼈저리게 깨달았어요. 그동안 제가 가졌던 관념이 공허한 추상이었던 것을요. 감상적으로 대중이라는 허상을 동정했던 거죠. 저는 추상을 좇다가 추상이 되어 버렸어요.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피라미드 같은 세상 구조의 어디나 선인이나 악인이 섞여 있는 거죠. 특정계급이나 특정한 한 사람만이 악인으로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게 아니었어요. 사람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자기에게 맞는 일을 하고 살아야 되는 걸 이제야 알았어요. 이제는 내가 추락하기 전의 그곳으로 다시 가고 싶어요.”

그녀는 온몸으로 처절하게 진리를 깨달은 것 같았다. 다행히 그녀에게는 단단한 헬멧 같은 보호구가 있었다. 그것은 일류대학 졸업장이었다. 그녀는 방송국의 작가가 되어 새로운 인생을 찾았다. 그녀는 이번에는 열렬한 크리스천이 됐다. 그녀는 내게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공산주의사상과 기독교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두 줄기 같아요. 그런데 공산주의에는 증오만 있고 사랑이 없어요. 공산주의 사상이던 저는 사이비 이단에 빠져 있었던 셈이죠.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친북노선도 김일성교 아닌가요? 세습을 하는 북한은 왕국이자 종교국가예요. 정통공산주의자들이 이게 뭐냐고 항의를 하다가 다 숙청당했죠. 거기에는 공산주의가 없어요.”

공산주의나 반공은 이미 그 의미가 희미해졌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좌파 우파로 갈라져 털을 곤두세우고 날카로운 손톱을 드러내는 것일까.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말고 자기의 양심과 가치관에 따라 살면 되는 건 아닐까.

나는 심리적 내전을 종식시키려면 사람들의 시선이 좌나 우가 아니라 위를 향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하늘에서 가진 것에 만족하는 마음, 작은 것에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만나 같이 내려오는 것을 받아먹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마음이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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