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계엄군과 시민…”민주화는 법전이 아니라 국민 정신에 핏빛으로 배어”

44년 반만인 며칠 전 윤석열 대통령이 다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나는 무서운 시민의 성장을 본 것 같았다. 계엄이 선포되자 마자 시민들이 국회로 몰려들었다. 부대원들이 탄 버스 앞에 드러누워 “나를 밟고 가라”며 저항하는 시민도 있었다. 군인들 앞을 막아서며 총 뿌리를 잡고 늘어지는 여성도 화면에 나왔다. 한 시민이 군인들에게 “여러분이 들고 있는 총은 국민들과 민주주의를 지키는데 사용해 달라”고 말하자 한 계엄군이 시민을 향해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제 민주화는 하얀 법전이 아니라 모든 국민의 정신에 핏빛으로 배어있는 것 같다. 사진은 2024년 11월 3일 심야 계엄군이 국회의사당 본회의실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 현장에 투입된 군인들의 인터뷰가 <조선일보> 기사(2024년 12월 6일자)로 나온 걸 봤다. 북한 관련 작전에 투입되는 줄 알고 갔는데 국회였다고 했다. 국회의원을 다 끌어내라는 명령을 받고 병사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는 것이다. 마지못해 유리창을 깨고 본청에 진입했다고 했다. 명령이라 일단 따랐지만 시민을 상대로 샷건까지 들고 가는 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사기가 떨어졌고 대원들은 뛰지 않고 느릿느릿 걸어다녔다고 했다. 시민들을 앞에 둔 군인들은 당황했고 일부는 패닉에 빠졌다고 했다. 시민들에게 제발 가까이 오지 말아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군인들은 자신들을 그냥 쓰고 버리는 소모품같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국가에 배신감이 들고 화가 난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는 위험한 순간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정말 잘 넘어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젊은 시절 서울 외곽의 부대에서 직업 장교 생활을 해 봤다. 정훈장교는 단순 논리로 병사들을 세뇌하고 적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가지게 하는 게 임무이기도 했다. 정훈장교의 정훈은 ‘정치훈련’의 약자로 알고 있었다. 때때로 군인들에게 노조나 시민을 국가질서를 무너뜨리는 적으로 착각하게 만들기도 했었다. 민주화시대를 거치고 시민의식이 높아지면서 병사들 역시 각자 판단 능력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 같다.

내가 장교로 근무하던 군사독재 시절의 전술은 지능적이었다. 병사들이 싸우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이 독이 오르게 해야 한다고 했다.

광주항쟁 당시 특전사 장교 출신은 내게 이런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전남대 문 앞에서 부대가 서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죠. 학생들이 모여들더니 우리들에게 욕을 하고 돌을 던지는 겁니다. 상부에서는 그래도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으라는 명령이었어요. 총은 있지만 실탄이 없으니까 우리들은 사실상 비무장인 상태였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못 잔 상태에서 우박같이 날아온 돌에 맞으면서 가만히 있으니까 분노가 일면서 그들에 대한 증오가 일어나더라구요. 우리는 달랑 얇은 군복만 입고 있었어요. 그러다 진압 명령이 났을 때는 우리도 눈이 돌아있는 상태였죠.”

이번 윤석열의 비상계엄 상황의 화면을 보면 군인들이 독을 품은 상황이 아니었다. 대치하는 시민들도 도발적인 행동을 하는 뇌관 같은 존재는 없는 것 같았다.

1980년 광주항쟁 당시 도청 앞 시위대의 제일 앞에 서 시민을 지휘하던 선배가 있었다. 그가 이런 말을 내게 했다.
“군인과 시민이 대치했지만 서로 대표가 만나 회의를 하고 수위를 조절하고 있었어. 그런데 어느 순간 시위대의 한 쪽에 있던 차가 군인 쪽으로 돌진하더니 사고를 낸 거야. 군인이 차에 깔려 죽은 거지. 잠시 후 군대 쪽에서 번쩍거리는 불빛이 보이더라구. 총을 쏘기 시작한 거지. 나는 골목으로 피해서 그때 목숨을 건졌어. 왜 시위대 쪽의 차가 돌진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어.”

군인과 시민의 충돌에서는 그런 지뢰 같은 존재가 숨겨져 있기도 하는 것 같다. 분노와 분노, 증오와 증오가 부딪치면 불을 뿜고 피가 솟구치기 마련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을 때 나는 수도군단 사령부 장교로 근무하고 있었다. 군부 내에서는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서로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무렵 대학을 졸업하고 장교로 군 복무를 하는 내 또래의 친구들이 많았다. 해병대 장교도 있었고 전방부대 소대장을 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전방 노태우 사단의 병력이 출동해 중앙청을 점령해 국무회의를 포위하고 특전사 군인들이 육군본부와 국방부에서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노태우 사단의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고교 동기가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갑자기 출동 명령이 났어. 그냥 훈련인 줄 알고 갔지. 가보니까 중앙청인 거야. 국무회의가 열리고 있다고 그래. 우리 소대가 중앙청을 경비하는 걸로 알았어. 그런데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한 거야. 그래서 나와서 공중전화로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 물어봤지.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그랬더니 내가 국무위원들을 협박하는 반란군 장교라는 거야.”

그는 군에 가기 전 빈민운동을 하던 운동권 출신이었다. 그렇게 우리들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어가기도 했었다.

해병대 장교로 간 친구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나는 호남 출신인데 경상도로 배치됐어. 매일 총검을 꽂고 길다란 몽둥이를 허리에 찬 부대원들을 트럭에 태우고 거리를 무력시위하는 게 내 일이었어.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거지. 명령이라 할 수 없이 했는데 이게 도대체 뭐지? 하는 회의가 들더라구. 그 때 내 고향 광주에서 큰 일이 벌어진 걸 알았는데 피가 들끓더라구.”

그게 노인이 된 우리가 젊은 시절 비상계엄 때 경험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44년 반만인 며칠 전 윤석열 대통령이 다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나는 무서운 시민의 성장을 본 것 같았다. 계엄이 선포되자 마자 시민들이 국회로 몰려들었다. 부대원들이 탄 버스 앞에 드러누워 “나를 밟고 가라”며 저항하는 시민도 있었다. 군인들 앞을 막아서며 총 뿌리를 잡고 늘어지는 여성도 화면에 나왔다. 한 시민이 군인들에게 “여러분이 들고 있는 총은 국민들과 민주주의를 지키는데 사용해 달라”고 말하자 한 계엄군이 시민을 향해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제 민주화는 하얀 법전이 아니라 모든 국민의 정신에 핏빛으로 배어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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