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석의 철학자 도장깨기-이황과 기대승] ‘사단칠정 논변’…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을까?

윤재석 기자의 ‘철학자 도장깨기’는 회를 거듭할수록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번엔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수십년에 걸친 ‘사단칠정’ 논변을 소개합니다. ‘도장 깨기’는 저명한 무술 도장(道場)을 찾아가 그곳 고수를 꺾는다는 뜻으로 요즘엔 특정 분야나 인물을 선정하여 그 분야를 파고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시아엔>의 ‘철학자 도장 깨기’는 동서양의 철학자 중 주요 업적을 남겼거나 특이한 삶의 궤적을 보인 철학자를 단독 또는 양축으로 내세워 면밀하게 들여다보는 코너입니다.<편집자>
이황과 기대승

조선시대 최대의 쟁론을 꼽으라면 역시 사단칠정(四端七情) 논변(論辯)을 들 수 있겠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 최고의 학자라는데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는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년)과 당대 최고 논객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1527~1572년) 간 장장 8년에 걸친 논쟁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상호 주고받는 서찰로 이뤄진 다소 진기한 논쟁이었으니 그만큼 성리학계는 물론 세간의 관심을 끌 정도로 당시 큰 화제가 되었다. 퇴계와 고봉의 사칠(四七) 논변은 명종 14년인 1559년 시작되어 1567년까지 지속되었다.

처음 시작은 퇴계가 <천명도설>의 구절 중 한 구절을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며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라고 수정한 대목에 대해 고봉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비롯됐다. 참고로 <천명도설>은 정지운이 1537년 <성리대전>에 나오는 인간과 사물의 본성에 대한 논의를 요약하고 종합하여 저술한 책이며, <성리대전>은 명나라 성조의 명으로 1415년 완성된 책으로 송대와 원대의 성리학자 120여 명의 학설을 채택하였으며, 전체가 7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늘의 달과 물속의 달

이렇게 시작된 논변은 퇴계가 고봉에게 답신을 보내면서 8년간의 긴 세월을 예고하며 발화되었다.
퇴계는 “천지지성은 비유하자면 하늘에 있는 달이고 기질지성은 비유컨대 물속에 있는 달과 같으니, 달이 비록 하늘에 있고 물속에 있는 차이는 있지만, 그것이 달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동일할 뿐이다. 그런데 지금 하늘에 있는 달은 달이라 하고 물속에 있는 달은 물이라고 한다면 어찌 이른바 ‘막힘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이른바 사단 칠정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가 기질에 떨어진 뒤의 일로서 마치 물속에 있는 달빛과 흡사한데 칠정은 그 빛에 밝고 어두움이 있으나 사단은 단지 밝은 것일 뿐이다. 칠정에 밝고 어두움이 있는 것은 참으로 물의 청탁 때문이고, 절도에 맞지 않는 사단은 빛이 비록 밝지만 물결의 동요가 있음을 면하지 못한 것이다. 바라건대, 이런 도리를 가지고 다시 생각해 보심이 어떠한가?”라 답신을 보냈다.

이를 간략하게 간추리면, 한마디로 퇴계는 이(理)와 기(氣)는 다르다는 시각이다. 즉, 이를 허공에 뜬 달에 비유하였고, 사단과 칠정이 나타나는 심적 상태를 물에 비쳐진 달에 비유하였다. 심리적 상태가 안정되어 있을 때는 마치 고요한 물에 달이 그대로 비춰진 것처럼 바르게 행동하나, 심리적 상태가 불안정 할 때는 물이 탁하여 달을 제대로 비추지 못한 것에 비유한 것이다.

이기일원理氣一元이냐 이기이원理氣二元이냐

이에 대해 고봉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제 생각은 다르다. 대개 사람의 정(情)은 하나이고, 진실로 이(理) 기(氣)를 겸하고 선악이 있다. 다만 맹자는 이 기가 묘합(妙合)한 속에서 나아가서 오로지 그 이에서 발하여 선하지 않음이 없는 것만을 가리켰으니 이것이 사단이다.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는 이 기가 묘합한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해 하고 있다 했으니 이 기를 겸하고 선악이 있어 그것이 칠정이다. 이것이 퇴계 선생의 주장하신 바 와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봉은 마음의 심리가 이와 기를 분리할 수 없다고 봤다. 그 근거는 ‘사단 또한 인간의 감정의 부분일 뿐이고 감정의 또 다른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윤리적 개념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들의 쟁론은 이후 조선 유교사상에서 이기일원론과 이기이원론으로 발전되며 결국 그 같은 주장은 동인과 서인, 그리고 남인과 북인, 노론과 소론 등 당파싸움으로 전개된다. 물론 고봉은 이기일원론을 주창하긴 했지만 계파의 대표는 아니었다. 사단칠정 논쟁은 조선 성리학을 심화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논쟁은 단순히 사단과 칠정을 이기의 개념과 연결시킨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 현상의 실재적인 면과 규범적인 면을 하나의 통일된 틀 속에서 설명하고자 한 철학적 사유의 표출이었다.

1559~1566년 퇴계와 고봉이 서신을 주고받으며 사단과 칠정의 성격과 관계를 치열하게 논의하게 되었고 서신 논쟁이 종료된 후에도 학문적 논의로 이어졌고, 이후 조선 유학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이 논쟁은 사단(四端:인의예지의 본성적 단서)과 칠정(七情:희로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 중 어떤 것이 성과 감정에 더 가까운 지를 다루며, 조선 성리학의 심성론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여기서 잠깐 사단칠정에 관해서 정의를 내릴 필요가 있다. 사단은 <맹자>에 나오는 ‘네 가지 감정 즉,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을 말하는 것으로 퇴계는 이를 ’선한 정감‘으로 이(理)가 발하여 기(氣)가 그것에 올라탄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한편 칠정은 <예기>에 나오는 일곱 가지 감정으로 퇴계는 氣가 발하여 理가 그것에 올라탄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반면 고봉은 ‘理’라고 하는 것은 원래 부동의 성질인데, 퇴계가 사단의 발생은 이의 발함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한 것을 놓고 지적했다. 원래 ‘理’라고 하는 것은 이치이고, 이는 기준을 의미한다. 기준이라는 것은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고정된 것이기 때문에 심정의 성질 가운데에서 고정된 것이라 보는 것이다. 그런데, 퇴계는 스스로 ‘이가 발하다’라는 단어를 스스로 제정하였고, 그 주장을 토대로 이기이원론을 전개한 것이다.

한자의 중의성(重義性) 고려해야

따라서, 이 논쟁은 이 부분만을 놓고 보았을 때, 고봉의 승리처럼 보인다. 하지만 원래 이 논쟁들은 한자로 서술된 것이다. 한자는 표의문자이기에 단어 하나가 복수의 개념을 담고 있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동양 철학의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데, 언어표현의 불명확성이 바로 그것이다.

퇴계가 말한 ‘발(發)’이라는 단어를 놓고 보자면,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움직인다’라는 ‘동(動)’의 의미를 지니며, 또 다른 하나는 ‘나타남’이라는 ‘현(現)’의 의미를 지닌다. 위 고봉의 주장에서 ‘發’을 ‘動’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고봉의 지적이 그르지 않다. 하지만, 發을 現의 의미로 해석한다면 이는 해석의 여지가 남는다.

성리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인간이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는가?’에 중점을 둔다. 그 원인이 심정에 기인한다는 것은 성리학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다루는 과제이다. 이 심정의 원리가 움직이는 것이냐 혹은 그렇지 않은 것이냐를 두고 많은 논쟁이 있으며, 성리학에서는 사실 이 과제를 결론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퇴계는 이를 본성의 나타남의 개념을 보다 가까이 했음은 그가 사용한 비유로 추측할 수 있는데, 이를 ‘달과 물의 관계’를 통해서 理와 氣의 관계를 설명하려 했다. 즉, 고정된 달의 모습이 물에 비추어 나타났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다.

서울대 총장과 신참 사무관의 대좌

사칠논변만큼이나 흥미로운 것이 두 사람의 만남, 그리고 그 후의 인연이다. 두 사람 사이에 사칠논변이 있기 직전인 명종13년(1558년) 퇴계는 그 해 10월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달 고봉은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다. 바로 그 달 32세의 고봉이 58세 된 퇴계의 한양 집으로 찾아가 만났다. 지금으로 치면 서울대 총장과 이제 갓 행정고시를 패스한 신임 사무관의 만남인 셈이다.

이 무렵에 논의한 것으로 여겨지는 퇴계의 사칠설에 대한 고봉의 비판 의견이 여러 경로를 거쳐서 퇴계에게 전해지게 되고, 비판을 접한 퇴계는 숙고 끝에 그의 비판을 일정 부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학설을 일부 수정하여 통지하는 방식으로 먼저 고봉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것이 퇴계와 고봉의 사칠논변의 시작이었다. 이른바 ‘퇴·고 사칠논변’의 첫 번째 편지는 한양의 퇴계가 전라도 광주의 고봉에게 1559년 1월 5일 써서 보낸 것이다. 그 요지는 “사단의 발은 천리(天理)를 따르기 때문에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의 발은 기를 아우르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四端之發 順理故無不善 七情之發 兼氣故有善惡)”로 개정하자는 것이다. 고봉은 이 편지를 2월 18일에 받는다. 고봉은 그 해 3월 5일 답서를 쓴다.

이렇게 서로 편지를 주고받는 방식으로 논변이 진행되다가 마지막으로 편지를 주고받는 순간이 오게 된다. 고봉은 1567년 1월 24일 퇴계에게 서찰을 보낸다. 이 서찰에서 “<후설> <총설> 등 2설을 인가받아 매우 다행스럽다. 다만 그간에 합상량처가 많으나 감히 경솔하게 논할 수 없으니 뒷날 혹 얼마간 다른 견해가 있게 될 때를 기다리겠다”라고 했다. 퇴계는 3월 18일에 편지를 써 서울의 고봉에게 부쳤는데 여기서 “사칠설의 합상량처에 대해 조만간 깨우쳐 줌을 받으면 매우 다행이겠다.”라고 답했다.

영남 퇴계退溪, 호남 고봉高峯의 아름다운 동행

이 논변은 사실 성리학의 관점에서만 보자면 매우 고루한 논변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이후 조선 정치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정치적 입장을 지지하는 학설로 발전한다. 아무튼 8년간의 사단논변, 또는 사칠이기논쟁은 세대를 초월한 두 거물의 서신 왕래로 이러졌다는 점에서 더욱 관심을 끌고 있다. 이기론의 첨예한 쟁론이라는 학술적인 의미뿐 아니라 퇴계의 인품과 고봉의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앞서도 얘기했듯 처음 논변을 시작할 당시 고봉은 대과에 급제해 이제 막 관직 생활을 시작한 신인이었던 반면, 퇴계는 이미 성균관 대사성이란 중책을 맡고 있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장관급인 서울대 총장과 갓 행시를 패스한 신임 사무관이 일 대 일로 토론을 벌인 격이다. 그럼에도 체계적이고 심도 있는 토론을 진행한 고봉의 능력과, 대사성이란 고위직에 있음에도 고봉을 전혀 무시하지 않고 진지하고 품위 있게 토론을 받아들인 퇴계의 인품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두 사람 모두 벼슬에 대해 하찮게 생각해 벼슬을 제수 받고도 거부한 사례가 많다는 점도 닮은꼴로 관심을 끈다. 퇴계의 경우 52세 이후 타계하기까지 18년 동안 무려 50회의 관직을 제수 받았으나 모두 사퇴하고 글 읽는 것과 후학 양성에 몰두했다. 제수를 거부한 직책 중에는 조선 학자 최고 영예인 홍문관 대제학과 예문관 대제학 등 양관 대제학직이 들어 있을 정도다.

고봉 역시 성균관 대사성과 사관원 대사간, 공조참의 등을 지내긴 했으나 사림파의 거두로 지목돼 훈구파에 의해 수다한 모함을 받아 자진 사직과 관직 삭탈을 거듭해 벼슬을 혐오하기까지 했다. “싸우면서 정 든다”고 했던가. 퇴계와 고봉은 치열한 논리 공방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서로를 존경하고(고봉 입장에서 퇴계를), 아끼는(퇴계 입장에서 고봉을) 관계로 평생을 이어갔다.

1570년 별세한 퇴계의 묘비문 한 쪽을 장식한 것도 고봉의 휘호였다. 그런 그도 이태 후 퇴계의 뒤를 따른다. 경상도 안동 출신 퇴계와 전라도 광주 출신 고봉 간의 아름다운 동행이라 지금 보기에 더욱 눈길이 간다.

[참고서적] 강성률 저 푸른솔 간 <2500년간의 고독과 자유 2>
남성욱 글 김세진 그림 마에스트로 간 <퇴계>
이상호 저 글 글항아리 간 <사단칠정 자세히 읽기>
퇴계 저 이장우‧장세후 역 연암서가 간 <퇴계잡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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