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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선종 16주기…”찢기고 갈라진 우리 어찌해야 합니까?”

김수환 추기경


 
‘우리들의 성자 하늘로, 추기경님 5000만을 적시다’-경향신문
“님은 떠났지만 우리는 보내지 않았습니다”-동아일보
‘사랑 사랑 서로 사랑할게요…’-문화일보
‘찢기고 갈라진 우리 한데 묶어놓고…’-세계일보
“고맙습니다. 사랑할게요”-조선일보
“사랑하겠습니다. 용서하겠습니다”-중앙일보
‘추기경 떠난 곳, 사랑이 남았다’-한겨레신문
 
2009년 2월21일자 도하 신문의 1면 머릿기사, 또는 사이트 톱기사 헤드라인이다. 87세를 일기(一期)로 2월 16일 선종(善終)한 고(故) 김수한 스테파노 추기경 장례 관련 기사에서 한국 언론은 사랑, 용서, 화해를 헤드라인 제목으로 장식함으로써 김 추기경의 삶과 선종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김 추기경 선종 후 무려 40만 명이 넘는 인파가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불원천리 명동성당 빈소에 찾아와, 세 시간 이상 기다리는 걸 마다않고 조문대열에 참여했을 정도로 전국을 ‘김수환 신드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마치 백지영의 히트송 ‘총 맞은 것처럼’ 마음에 큰 구멍이 뚫린 인파가 가뜩이나 어려운 시절에 선종한 것이 아쉽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했을 것이다.
 
<한 언론인의 평전>
 
우리에게 김 추기경은 어떤 존재일까? 한 언론인이 김 추기경 장례 직후 쓴 짧은 평전으로 선종 16주년을 맞는 김 추기경을 반추해본다.

다음은 그 평전.
 
김 추기경의 삶은 한마디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교과서적인 모범답안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훌륭한 종교인을 넘어 한국 사회의 큰 어른이자 정신적 지도자였다.
“교회는 자기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고 세상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남을 위해서 있다”고 말한 김 추기경은 교회 안에서만 머물러있지 않고, 사회로 나와 소신 있는 발언을 잇따라 쏟아내며 한국 사회가 나아갈 길을 밝혀온 큰 횃불이었다. 항상 자신을 낮췄고, 소외된 자, 고통 받는 자, 억압 받는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을 암탉이 병아리 품 듯 보호했고, 특히 독재와 억압 폭력 등 불의에는 분연히 맞섰다. 그러기에 그분의 빈자리가 더욱 커 보인다.
 
한국사 고비마다 용기 있는 행동
 
무엇보다 김 추기경은 우리 사회의 어른으로서 실천하는 한국사의 고비마다 양심의 길을 걸어왔다. 1970년대 민주화 운동 현장에서 김 추기경은 소신 있는 정치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으며 민주화 운동의 한 가운데에 섰다. 김 추기경은 1971년 예수성탄대축일 때 장기 집권의 길로 들어선 박정희 정권을 처음으로 공개 비판했다. 전국에 생중계된 이 미사는 강론 말미에 정권의 지시로 중단되기도 했다.

이듬해 7‧4 남북 공동성명 발표와 8‧3 긴급조치, 10월 유신으로 이어지는 정국의 혼란기에서 주교회의 의장이던 김 추기경은 시국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에는 “7‧4 남북 공동성명을 평화 위장의 전쟁 준비 수단이나 권력 정치의 기만전술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민족과 더불어 엄숙히 경고하며, 사회 안정과 질서를 흔드는 비상조치를 남발하는 권력의 폭주를 엄계한다”는 등의 강도 높은 발언이 담겼다. 이후 1974년 지학순 주교의 구속을 시작으로 1976년 명동 3‧1절 기도회, 1978년 전주교구 7‧18 기도회 등에서 사제들이 잇따라 구속되면서 고인은 잇단 성명서와 강론을 통해 자유언론과 인권, 민주회복 등을 강조했다.

1980년대 명동성당이 민주화 운동의 해방구 역할을 하면서 김 추기경의 소신 행보도 이어졌다. 고인은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모든 신자들에게 광주를 위한 특별기도를 요청했으며 6‧10 국민운동 당시에는 명동성당에 진입한 시위대를 강제 연행하려던 정부에 단호하게 맞서기도 했다. 김 추기경은 매일 미사를 집전할 때마다 항상 마지막 기도와 축복은 북한 신자를 위해 바칠 정도로 통일에 대한 깊은 열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 ‘레드 콤플렉스’가 극심했던 시절에도 북한 관련 발언을 해 소신을 밝혔다. 1989년 서경원 의원의 방북사건이 있을 무렵 그는 기자회견을 자청해 남북관계 호전을 바라는 교회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해 북한은 바티칸을 방문했던 김 추기경을 평양에 초대하기도 했는데 최종 조율단계에서 무산되고 말았다.
 
평생 어렵고 약한 이들과 동고동락
 
하지만 김 추기경의 진면목은 인간에 있었다. 그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하는 공동선의 추구에 목표를 두고 소외된 자들의 인권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경제 성장이 지상과제이던 1960~70년대 추기경은 산업화 과정에서 희생된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돌렸다. 1967년 5월 강화도 심도직물의 노조원 해고 사태 당시 김 추기경의 건의에 따라 주교회의는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교단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며 처음으로 대사회 메시지를 던졌다. 이후에도 동일방직 사건 등 유사한 노동 탄압 사례가 있을 때마다 추기경은 노동자 인권을 지키는 데 앞장섰다. 김 추기경의 인권과 생명 사랑 정신은 사형제 폐지와 낙태 반대에 대한 천주교의 목소리도 키웠다.
 
고인의 삶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김 추기경은 자신이 낮아지면 오히려 높아진다는 기막힌 역설, 자신을 희생하면 오히려 자신에게 유익이 돌아온다는 기막힌 역설, 자신이 관용을 베풀면 세상이 편해진다는 기막힌 역설을 몸으로 증명한 대한민국 뿐 아니라 세계의 큰 어른이다. 그것은 안구 기증과 사람들 모르게 슬그머니 행한 나눔과 베품의 선행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가 뿌린 나눔과 베풂의 씨앗은 벌써부터 열매를 맺고 있다. 하루 6건에 불과하던 장기 기증 신청이 무려 45건으로 늘어났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종교를 초월하여 김 추기경이 남긴 사랑, 용서, 화해의 삶을 살려고 애써야겠다. 나에게 아쉽고 갈급하여 생각하게 하는 인물이 바로 김 추기경이다. 그런데 고인이 되었으니, 그야말로 가슴에 총알을 맞은 느낌이다.

<김 추기경 어록>
 
△주님, 사실 저는 다른 길을 가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다른 길은 보여주지 않으시고 오로지 이 길만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1951년 9월 15일 사제 서품식 때 제단 앞에 부복했을 때 한 기도)
△나는 이미 모든 것을 교회에 바친 사람입니다. 2년 전 주교 서품을 받을 때 정한 사목 표어 ‘여러분과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를 되새겨 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의 막중한 사명인 현실 참여는 어떻게든 실천해야 하며 서울 대교구가 한국 일반 정서에 비춰 지방교회에 봉사하는 교구가 돼야 한다는 점입니다. (1968년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된 후 가톨릭 시보와 가진 5월 5일자 인터뷰)
△비상 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한테 막강한 권력이 가 있는데, 이런 법을 또 만들면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그렇게 되면 국가 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입니다. (1971년 12월 24일 전국에 TV로 생중계된 성탄 자정 미사 강론에서-박정희의 분노로 중계 중단)
△10월 유신 같은 초헌법적 철권통치는 우리나라를 큰 불행에 빠뜨릴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1972년 10월 17일 회의 차 이탈리아 로마에 머물다 유신 소식을 듣고 로마 주재 한국대사에게)
△주교님, 양심대로 하십시오. 우리야 가진 거라곤 양심밖에 없지 않습니까. (1974년 8월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을 말리던 가운데 나온 말)
△이제 대통령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주님 앞에 선 박정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1979년 11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식장에서 한 기도)
△서부 활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서부 영화를 보면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잖아요. (1980년 설 새해 인사차 방문한 전두환 당시 육군 소장에게)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시한부 농성 중인 신부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 그 신부들 뒤에는 수녀들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연행하려는 학생들은 수녀들 뒤에 있습니다.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 (1987년 6월 13일 밤 경찰력 투입을 통보하러 온 경찰 고위 관계자에게)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그런데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모르는 일입니다”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 위정자도 국민도 여당도 야당도 부모도 교사도 종교인도 모두 이 한 젊은이의 참혹한 죽음 앞에 무릎을 꿇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부끄럽게 살아온 그의 죽음 앞에 새롭게 태어나 그가 못다 이룬 일을 뒤에 남은 우리가 이룬다면 그의 죽음은 절대 헛되지 않으리라 확신합니다. (1987년 1월 26일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발생 뒤 명동성당에서 열린 ‘박종철군 추모 및 고문 추방을 위한 미사’ 강론 중)
△현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이 언제부터 시작됐느냐고 물으면 어머니 태중에 임신된 순간부터라고 말할 것입니다. 내 생명이 그렇다면 남의 생명도 그렇게 인정을 해야겠지요.(평화방송 평화신문 1993년 신년 특별대담 중 낙태를 비판하며)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무슨 보복이나 원수를 갚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역사바로세우기를 위해섭니다. 책임자는 분명히 나타나야 하고, 법에 의해 공정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평화방송 평화신문 1996년 신년 특별대담 중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또 평양교구의 교구장 서리로 있기 때문에 정말 목자로서 가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고 또 의무입니다. 사실은… 가봐야 하는 게 의무인데, 그걸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대단히 안타깝습니다. (1998년 평화방송 신년대담 중 방북에 대한 열망을 나타내며)
△삶이 뭔가, 삶이 뭔가 생각하다가 너무 골똘히 생각한 나머지 기차를 탔다 이겁니다. 기차를 타고 한참 가는데 누가 지나가면서 ‘삶은 계란, 삶은 계란’(웃음) (2003년 11월 18일 서울대 초청강연 중)
△누가 나한테 미사예물을 바칠 때 자연히 내 마음이 어디로 더 가냐면 두툼한 쪽으로 더 가요. ‘아니’라고 하는 게 자신 있는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안 그래요. 나는 두툼한 데 손이 더 가요. (웃음) 그리고 어떤 때는 무의식중에 이렇게 만져보기도 해요.”(2005년 부제들과의 만남에서)
 
<나와 김 추기경>
 
1998년 10월4일 일요일 추석 전날 샌프란시스코 교외 오클랜드 한인성당에서 한가위 미사 집전 후 김 추기경과 점심 식사를 하면서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때 든 느낌은 정말 편안한 분이었다는 것이다.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 그 중에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대목이 있다.

김 추기경은 그때 시애틀을 거쳐 왔는데, 그곳에서 한 의사 부부로부터 진정한 포용의 의미가 무언지에 대한 질문을 받고, “당신 딸이 흑인 남자를 데려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내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게 포용의 첫걸음”이라고 얘기하셨다고 한다. 인종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신분이 달라도 개의치 않고 포용하신 그 분의 너른 가슴이 다시 생각난다.

이젠 아는 분이 많지만, 일화 하나 더 소개하면 김 추기경이 가장 좋아한 가요 레퍼토리가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늘은 울고 싶어라’로 시작하는 김수희의 애모인데, 가사 중에 수다하게 나오는 ‘그대’를 ‘하느님’으로 치환하면 절묘한 성가가 된다. 김 추기경은 샌프란시스코의 한 모임에서도 그 노래를 불러 좌중을 숙연케 했다. 거의 음치에 가까운 노래 실력이지만 그는 가요 한곡으로도 좌중을 휘어잡는 조용한 카리스마의 소유자였다.

2월 16일 선종 16주기를 앞두고 한없이 선했던 ‘바보’ 김 추기경의 모습이 떠오른다.
2014년 김수환 추기경 선종 5주기 열린 추모미사

윤재석

'조국 근대화의 주역들' 저자, 傳奇叟(이야기꾼), '국민일보' 논설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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