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볼테르(Voltaire)라는 필명으로 알려져 있는 프랑수아마리 아루에(François-Marie Arouet‧1694~1778년)와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1712~1778년)는 18세기 동시대를 살았던 프랑스의 계몽주의 작가와 철학자였다.
볼테르가 <샤를 12세의 역사>, <루이 14세의 시대>, <각 국민의 풍습·정신론>, <캉디드> 등으로 필명을 날린 데 비해, 루소는 사회계약론자이자 직접민주주의자, 공화주의자로 <에밀>, <사회계약론>, <인간불평등 기원론> 등과 세계 3대 참회록으로 불리는 <고백록>의 저자로도 유명하다.

계몽주의 작가의 탄생
파리의 공증인 집안에서 출생한 볼테르는, 11세 때 예수회가 운영하던 루이 르그랑학교에 들어가, 어린 나이에 두각을 드러내었고 평생 이어갈 교우관계 또한 형성했다. 12세 때 대부(代父)인 샤토뇌프 신부가 그를 쾌락주의적이고 무신론적인 귀족과 시인들이 모이는 ‘탕플(Temple)’이라는 문학 살롱에 데리고 갔다. 17세에 루이 르그랑을 떠나면서 아버지에게 문인이 되고 싶다고 말하지만 아버지는 법조계를 택하라고 얍력을 가한다.
볼테르는 법대에 등록은 하지만 사치와 방탕을 선망한다. 이후에도 문학 살롱에 드나들면서 재기를 발휘하며 문재(文才)를 증명해 보이던 그는 24세에 <오이디푸스>를 내놓아 유명해진다. 그 시대의 많은 작가들이 그렇듯 볼테르도 존중받는 장르였던 비극과 시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1717년 루이 15세의 섭정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를 풍자한 시를 썼다고 오인돼 투옥되었다. 출옥 후 비극 <오이디푸스>의 대성공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궁정에서도 주목을 끌었다. ‘아루에(Arouet)’라는 평민의 성을 버리고 자칭 ‘드 볼테르 씨(M. de Voltaire)’로 개명하면서 스스로 신분 상승을 꾀했다.
한편 프랑스의 전제정치의 패악을 통감한 그는 자유로운 영국에 공감을 갖고 존 로크와 아이작 뉴턴의 영향을 받아 더욱 강고한 비판정신을 유지하게 되었다. 영국에 머무르던 1728년 서사시 <라 앙리아드>를 출간하였다. 이 책은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간 종교전쟁의 에피소드와 앙리 4세의 즉위를 형상화한 시다. 광신의 무서움을 고발하고 프랑스의 정치 체제를 비판한 풍자시였다.
이듬해 프랑스로 귀국했지만 비극 <자이르>와 이어 발표한 <철학서 간>이 영국을 추앙하고 프랑스를 비방했다는 이유로 당국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책이 소각되자 연인인 샤틀레 후작부인의 영지에 들어가 10년간 저술과 연구로 세월을 보냈다. 이어 프리드리히 국왕의 초청으로 프로이센에 가서 <루이 14세의 시대>를 완성하고, 또 여러 곳을 전전했다.
反가톨릭 캠페인 주도
수년간을 제네바에서 보내다가 1753년 프랑스령으로 제네바와 가까운 페르네에 정착하여 시·극시·우화·소설·수필 등 다양한 작품을 발표, 전 유럽에 ‘볼테르 시대’를 열었다. 진보파의 영수로 ‘페르네 장로’라 불렸고 반봉건, 반가톨릭 캠페인을 전개했다.
그중에서도 가톨릭교회와 예수회의 광신이 원인이 된 부정 재판을 탄핵한 ‘칼라스 사건’을, 사재까지 털어 변호하고 희생자들을 강력하게 옹호한 실천 운동은 지금까지도 그를 확고한 관용론자로 부를 정도다.
그는 <관용론>에서 칼라스 사건으로 처형된 장 칼라스를 적극 옹호하며 “불관용은 신의 법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한다면, 순교자가 될지언정 망나니가 되지는 말라”며 종교의 관용을 주장했다. 역사책 <풍속시론>, 사상소설 <캉디드>, <철학사전> 등도 이 시기에 출간되었다.
작가로서 볼테르는 비극 작품들과 서사시, 역사물 등을 통해 일찍 성공을 거두었지만 작품들은 오늘날 별로 읽히지도 않거니와 잘 알려져 있지도 않다. 반면, 재미 삼아 쓰고 익명으로 출간했던 콩트들이 오늘날까지 잘 알려져 있다. 그중 많이 읽히고 널리 알려진 작품은 <캉디드>, <자디그>, <랭제뉘> 등이다.
유물론 철학자인 드니 디드로의 <백과전서> 집필에도 참여하는 등 철학자로서, 작가로서, 행동하는 양심으로서 평생 왕성한 활동을 벌인 볼테르는 84세까지 장수를 누리고 1778년 별세했다.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혁명 2년 뒤인 1791년, 국가를 위해 큰 공헌을 한 인물이 들어가는 팡테옹에 그를 안치했다.
불우했던 루소의 어린 시절
루소는 시계공인 아버지와 평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루소 출산 닷새 후 출산 후유증으로 숨졌다. 10세 땐 아버지마저 가출해 숙부에게 맡겨져 여러 직업에 종사하며 각지를 돌아다녀야만 했다. 1724년부터 루소는 법원 서기가 되기 위한 직업 교육을 받았다.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가톨릭 세례를 받은 그는 1728년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사제가 될 의향이 없어 신학 공부를 포기하고 음악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1730년 스위스 로잔으로 이주하여 가명으로 악사 생활을 했다. 이듬해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한 후 리옹을 거쳐 샹베리 등지에서 생활했다. 1732~40년 음악에 몰두하고, 많은 독서를 하며 다방면에 걸쳐 교양을 쌓은 그는, 1741년 계몽주의자이자 백과전서파인 디드로, 장바티스트 르 롱 달랑베르, 에티엔 보노 드 콩디약 등과 파리에서 만나 친교를 맺었다.
루소는 여러 귀족 부인과 사귀었지만, 1745년 하녀 마리 테레즈 르 바쉬에르와 23년간의 동거 끝에 결혼했다. 문제는 루소가 그녀와의 사이에 낳은 5명의 아들을 모두 고아원에 보낸 것이다. 이유는 아이들이 너무 소란스러운 데다 양육비가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위대한 교육이론가라는 명성을 받은 그도 자신의 자녀 양육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자신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학술‧예술서 두각, <백과전서> 편찬도 참여
1749년부터 루소는 친해진 디드로의 권유로 응모한 프랑스 아카데미의 학술 공모전에 <학문 및 예술론>이 1등으로 당선되어 이름을 떨쳤으며, 작사·작곡한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가 공연된 것도 이때의 일이다. <백과전서> 편찬에 참여해 음악과 정치‧경제 항목에 관한 글을 쓰고 이듬해에 계몽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학문예술론>을 출판한다.
한편 남프랑스 디종의 학술원에서 “무엇이 인간 불평등의 근원인가?”를 주제로 학술연구 공모전에 제출하기 위해 정치‧사회제도에 관해 골몰, 소유권 제도와 사회 조직의 발전으로 생긴 불평등과 비참함을 자연 상태의 자유롭고 평등한 상태와 대립시켜 설명했다. 이는 이후 <사회계약론>의 바탕을 이루었다.
1762년 저술한 <사회계약론>에서 자유와 평등의 자연권을 국가 상태에 있어서 확정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로서 사회계약론을 전개하고 인민주권의 이론을 완성하였다. 권력 행사가 정당화되는 유일한 조건으로서 ‘항상 정당한’ 일반 의지를 설정하고, 실제에서는 그것이 직접적인 다수결에 의하여 확인될 수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잠깐, 루소와 볼테르 사이에 있었던 몇 가지 논쟁에 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서 1755년 루소는 논문 형태의 <인간불평등 기원론>을 이미 저명한 문필가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 볼테르에게 보냈다. 일종의 감수 요청이었다. 문제는 볼테르의 반응이었다. 그는 책을 읽고는 분노하여 <인간불평등 기원론>의 여백에 이렇게 휘갈겨 썼다고 한다.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약탈당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거지의 철학을 보라!”
주식투기, 국제무역과 고리대금 등으로 프랑스 안에서 당시 20대 개인 갑부였던 볼테르는 “사유재산으로 인해 불평등이 생긴다”는 루소의 주장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인간 이성을 통해 문명의 진보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던 볼테르 및 주류 계몽철학자들은, 문명이 도리어 인간을 옥죈다는 루소의 사상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볼테르와의 불화 속 루소 고립
루소와 주류 계몽철학자들은 서로의 사상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상대를 비판했고, 루소는 결국 절친이었던 디드로와도 멀어졌다.
루소와 볼테르는 리스본 대지진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내면서 사이가 더욱 틀어지게 된다. 1755년 포르투갈에 대지진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 특히 당시 미사를 드리기 위해 성당에 모였던 수만 명의 신도들이 숨지자, 볼테르는 “전지전능하면서도 한없이 선하다고 하지만 대지진을 막지 않은 신”에 대해 회의감을 드러냈는데, 독실한 루소가 볼 때 잘못이 있는 쪽은 그곳에 문명을 건설한 인간이었지 대지진을 일으킨 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루소의 주장에 화가 난 볼테르는 자신의 입장 해명과 하께 루소를 비꼬는 편지를 저명인사들에게 뿌렸다. 이에 루소와 볼테르의 사이는 더욱 험악해졌다.
이후로 둘은 이슈가 있을 때마다 반대의견을 내면서 부딪쳤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사건은 ‘제네바 연극 금지법’에 대한 것이다. 당시 금욕적인 청교도 제도를 따르고 있던 제네바는 연극을 금지하고 있었는데, 극작가이기도 한 볼테르는 제네바의 연극 금지 제도를 해제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에 루소는 1758년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연극에 관한 편지>에서 볼테르에 반대하며, 제네바의 연극 금지 제도를 찬성한다.
당시 연극은 상류층만이 즐기는 것이었기 때문에, 평민도 참여할 수 있는 대중적인 축제를 더 권장해야 된다는 것이 루소의 생각이었다. 당연히 볼테르는 분노했고, 루소는 주류 계몽철학자들과 아예 갈라서게 된다. 루소 스스로 졸지에 ‘계몽주의의 적대세력인 계몽주의자’가 된 셈이다.
루소는 1778년 뇌출혈로 숨졌으며 11년 후 일어난 프랑스혁명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1794년 그의 유해 역시 팡테옹으로 옮겨져서 볼테르와 나란히 묻혔다.
[참조]강성률 著 푸른솔 刊 <2500년간의 고독과 자유 1>
볼테르 著 이병애 譯 문학동네 刊<미크로메가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볼테르 著 일이관지논술모임 譯 다락원 刊 <캉디드>
장 자크 루소 著 김중현 譯 임프린트펭귄클래식코리아 刊 <사회계약론>
장 자크 루소 著 일이관지논술모임 譯 다락원 刊 <인간불평등 기원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