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30) 미군의 작전상 후퇴?···’일본군 옥쇄’와는 너무 달랐다
8군의 우측방을 지키기 위해 2사단이 치룬 대가로 1군단과 9군단은 11월 30일 청천강을 도하하여 숙천(肅川)~순천(順川)선에서 급편방어선을, 다시 12월 3일에는 순안(順安)~성천(城川)선으로 철수하여 평양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성천이 중공군의 수중에 들어가자 평양방어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파국을 면하는 것은 즉각적인 철수밖에 없었다. 12월 3일 맥아더 장군은 38도선으로 총퇴각을 결심하였다. 8군은 우세한 기동력을 이용하여 신속히 전선을 이탈, 지연진지를 점령해가면서 38도선으로 철수하는 방책을 취하였다. 12월 5일, 장장 200km를 한달음에 철수한 8군은 임진강 북안에 도착하여 임진강과 38도선을 연하는 방어진지를 점령하였다. 8군의 후퇴를 지켜 본 한국민은 ‘작전상 후퇴’라고는 하나 그 황망함에 충격을 받았다. (옥쇄할지언정 후퇴를 용인하지 않는 일본군의 전법과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8군이 이처럼 궤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이때부터 본격 활동을 개시한 최현의 제2전선 때문이기도 하였다. 후퇴하여 겨우 숨을 돌리고 방어진지를 편성하려고 할 때마다 후방에서 공격을 가해오는 ‘걸어가는 공정군단‘에 혼비백산하여 후퇴하는 낭패가 되풀이되었던 것이다. 제2전선의 설정과 활약은 김일성이 특히 강조한다. 총정치국장 최룡해는 최현의 아들이다.
8군이 후퇴할 때 북한주민 300만명도 피난길에 합류하였다. 부서진 철교 교각에 매달려 대동강을 건너는 피난민들은 자유를 향한 처절한 집념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북한을 버리는 피난민이 그렇게 많았다는 것은 북한 주민들이 얼마나 자유를 갈구하였던가를 보여준다. 6.25전 소련군정 시기에 38선을 넘은 사람들은 대개 지주나 기독교인 등, 공산체제와 하늘을 함께 할 수 없는(불구대천) 사람들이었으나, 1950년 말에 월남을 택한 사람들은 낱알을 세어 세금을 뜯어가는 ‘악덕지주‘ 공산당의 민낯에 기겁을 한 서민들이었다. 이들의 반공정신은 골수까지 철저하여 김대중 정부의 금강산 관광도 김정일 패당(牌黨)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참여하지 않았다.
한편, 중공군의 공세는 현지조달 보급체계와 교전에서 입은 막대한 병력손실 보충 등으로 1주일 이상 지속하지 못했다. 기동력의 열세로 유엔군에 계속적으로 압력을 가하지 못한 중공군은 평양 부근에서 재편성에 들어갔다. 정비를 마친 중공군은 도보 또는 우마차를 이용하여 일일 10km의 속도로 38선을 향해 남진하였다.
11월 30일 맥아더 장군은 10군단에 12월 9일부터 철수를 개시하여 12월 27일부로 8군의 지휘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12월 14일 1해병사단이 승선을 완료, 부산으로 향하였고 뒤를 이어 7사단이, 마지막으로 3사단이 승선하였다. 국군 1군단의 3사단은 흥남에서 철수하여 부산에 상륙하고 수도사단은 성진(城津)에서 철수하여 묵호에 상륙하였다. 미10군단과 국군1군단은 철수작전을 통하여 병력 105,000명과 17,500대의 차량, 35만t의 물자를 철수시켰다. 한국 해병대가 미 해군의 함포사격과 함재기의 공중지원에 힘입어 흥남철수작전을 엄호하였다. 1군단장 김백일 장군은 알몬드 장군에 간청하여 피난민 10만 명을 철수작전에 포함시켜 구해내었다.
그 은공을 잊지 못한 월남민들이 처음 도착한 거제도에 김백일 장군의 동상을 세웠다. 노무현 정권에서 종북좌파들이 김백일 장군 동상을 쇠사슬에 묶어 끌어내렸다. 이를 정부에서 막지 못했는데 우국지사들이 지켜냈다. 이 사실(史實)은 삭제하지 않고 史草에 남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