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33) 1·4후퇴 열흘 전 이승만 ‘220만 서울시민 피난령’
청천강와 장진호에서 세계 최강의 미군을 격파함으로써 자신을 얻은 중공군은 급기야는 한반도와 대만에서 미군이 철수하고, 중공이 합법정부로서 유엔에 가입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로써 이 무렵 휴전안을 모색하고 있던 서방측에게 굴복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서방측이 이를 거부하자 그들은 유엔군의 북진으로 38도선은 말살되었으니 이번이야말로 북한군이 실패한 한반도의 무력적화를 성취할 때가 왔다고 공공연히 선언하고 나섰다.
1951년 1월 1일 중공군은 전 전선에 걸친 공격을 강화하였다. 중공군은 13병단의 4개 군을 전방, 2개 군을 예비로 하여 연천과 철원 축선으로 서울로 쇄도하였다. 사기가 떨어진 8군은 중공군의 강한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밀리기 시작하였다. 날이 밝은 지 얼마 안 되어 중공군은 38도선을 넘어 10km 이상 남진하였다. 중공군은 편의대(便衣隊)를 침투시켜 아군 진지에 접근한 후에 대군이 따라와서 맹공을 가하였다. 아군 전선은 겉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무너져 갔다. 그동안 국군은 여러 차례 어려운 고비를 넘기면서 많은 간부와 고참병들을 잃었기 때문에 중공군의 1월 공세를 받았을 때 각급부대는 거의 신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아군이 중공군을 무서워 한 것은 그들이 인명손실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무제한으로 병력을 투입하는 것이었다. 당시 중공군은 21개 사단 27만 6천명에 달했다.
반미감정에 불을 붙인 노근리 사건은 이런 공산군의 전술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 희생을 어찌할 것인가? 그래서 전쟁은 비참한 것이다.
1951년 1월 1일 임진강~38도선에서 철수한 미1군단은 서울을 중심으로 그 북방에 방어선 ‘C’를 설정하여 좌로부터 미25사단, 영연방 29여단 및 한국군 1사단 순으로 수도권 방어선을 급편하였다. 김포반도는 미 25사단에 배속된 터키 여단이 배치되었다. 이때 중동부 전선에 형성된 돌파구를 확대한 북한군이 제천까지 진출하여 안동지구의 제2전선의 2군단과 접촉을 시도하여 8군의 동측방이 위협받게 되었다. 중부전선의 돌파를 그대로 두면 북한군이 대전이나 대구까지 돌진함으로써 전선이 동서로 두 동강 날 것이 확실시 되었다.
1951년 1월 3일 중공군이 수도권 방어선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자, 서울 북쪽에 있는 유엔군을 조기 철수시켜야 부대 전투력을 보존할 수 있다고 판단한 리지웨이 장군은 무초 대사를 통해 서울 포기를 한국정부에 통보한 다음, 각 군단장에게 서울 남방 60km 지점인 방어선 ‘D'(평택~삼척선)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리하여 “땅을 내어주면서 적에게 최대한 살상을 가하다가, 보급로의 연장으로 적의 군수능력이 한계에 달했을 때 반격으로 전환한다”는 리지웨이 장군의 작전구상에 따른 철수가 시작되었다. 1월 4일 영연방 27여단이 한강가교를 통과한 뒤, 이 가교는 폭파되고 서울은 중공군에게 함락되었다. 통한의 1·4 후퇴였다.
이에 앞서, 12월 24일 이승만 대통령은 군사작전상 불가피한 서울 철수를 예견하여 서울 시민의 피난을 지시하였다. 당시 피난민은 서울 시민 120만명, 북한 월남인 50만명, 남한 실향민 50만명, 총 220여만명이었다. 1월 3일 이전에 100만명이 이미 한강을 건넜다. 국가가 경각의 위기에 처해 믿을 것은 군밖에 없다. 兵者 國之大事 死生之地 存亡之道 不可不察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