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29) 미 육군 초토화, 그러나 Chosin Few는 전설로 남아

11월 27일 중공군 9병단 예하 79, 89 및 59의 3개 사단이 장진호 일대에 매복하고 있다가 미 해병 1사단을 기습 공격하였다. 그 후방에서는 58 및 76사단이 하갈우리에서, 60 및 77사단이 고토리를 완전히 포위하고 철수해 오는 미 해병대를 노리고 있었다. 꼼짝없이 8군의 2사단이 당한 것과 같은 인디안 태형이 시작될 판이었다. 영하 20~30도의 혹한 속에서 동상자가 속출하고 탄약은 점점 고갈되어 갔다. 마침내 장진호와 흥남사이의 주보급로가 차단될 위험에 놓이자 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철수를 결심하였다.

미 공군 군수사령관은 스미스 장군에게 항공철수를 권고했다. 그러나 스미스 장군은 빠르고 안전한 이 방법을 물리쳤다. 마지막까지 비행장을 경비한 병력에게 도보로 철수하게 할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많은 전투장비와 보급품을 적에 남겨주어서는 안 된다는 투철한 군인정신의 발로이기도 하였다.

미 해병 1사단의 철수대열은 정연했다. 철수하는 것이냐는 종군기자의 물음에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공격하는 것이다”(We attack another direction)고 답변하였다. 스미스 장군의 이 답변은 신문에 보도되어 크게 유명해졌다. 이는 해병정신의 요체였다. 철수나 후퇴라는 말을 거부한 것이다. 철수하는 쪽에도 적이 있으니 다른 방향으로 공격한다고 한 것이다.

그 후 근 2주일 동안 공수보급에 의존하면서 악전고투를 계속한 끝에 유담리와 장진호 동반, 하갈우리에서 중공군의 포위망을 돌파한 미 해병대는 마지막으로 고토리와 황초령에 구축된 중공군의 차단선을 돌파하고 11월 11일 흥남의 집결지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해병1사단의 손실은 심대하였다. 개마고원 일대는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곳이다. ‘장진호의 영웅’ 데이비스 장군은 전우 공정식 장군에게 “1950년 겨울 장진호는 체감온도 영하 50도의 추위였다”고 회고했다고 한다.(2013년 초 서울의 최저기온은 영하 17도였는데 모두 기록적 추위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10월 26일 원산에 상륙한 이래 전투손실은 4400여명에 달하였고 비전투손실이 7300여명에 달하였는데 대부분이 동상이었다. 언제나 지형과 기상은 보병전투의 결정적 요소다. (손자의 五常: 道 天 地 將 法) 이 전투에서 중공군도 미 해병대와 공군의 화력에 의하여 37,500명 살상이라는 심대한 손실을 입었다.

중공군 9병단의 병력은 10만명이었다. 미 해병대에 비해 10배의? 압도적인 우세를 가지고 한반도에서도 가장 험준한 산악지형에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 공격해오는 중공군은 악마 바로 그것이었다. 중공군의 은폐 엄폐는 완벽했다. 야전군기는 서방군대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격했다. 불을 피운다든가 하여 야전군기를 어기는 자는 현장에서 즉결처분되었다. 미군이 중공군에 대한 정보가 어두웠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 동양의 농민군 중공군이 감히 세계 최강의 미군을 상대로 개입할 리가 없다는 맥아더와 합참 등 수뇌부의 판단은 물론, 적을 현장에서 상대하는 워커 등 야전지휘관도 중공군에 대한 지피지기(知彼知己)에서 무능하였다.

다만 미 해병대의 정신만은 빛나고 있다. Chosin Few(‘장진호 전투’ 생존 해병대원)는 전설이 되었다. “Semper Fidelis!”(항상 충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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