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27)이승만 10.27 대대적 개선행사···파국의 시작
유엔군은 1950년 10월 23일 청천강을 도하하기 시작하였다. 24일 맥아더 장군은 9월27일 합참에 의해 설치되었던 정주~영변~함흥을 잇는 북진한계선(일명 맥아더라인)을 철폐하고 전군에 압록강 선으로의 총 진격을 명하였다. 사기충천한 국군과 유엔군 장병들은 추수감사절까지는 전쟁이 끝날 것이며, 크리스마스는 본국에 돌아가서 지내게 될 것이라고 전세를 낙관하였다. 심지어 유엔군은 이때부터 종전 후의 부대 재배치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하였다.
10월 24일 8군은 미 1군단을 좌, 국군 2군단을 우로 하여 압록강 남쪽의 박천~운산~희천선까지 진출하여 험준한 적유령(狄楡嶺) 산맥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8군의 우익으로 중부의 내륙지역을 진격하여 온 국군 2군단은 6사단을 좌, 8사단을 우로 하여 초산과 만포진을 목표로 진격을 계속하였다. 10월 26일 6사단 7연대 1대대는 드디어 압록강변인 新道場에 도착하여 태극기를 꽂았다. 이대용 중대장은 압록강 물을 담아 이승만 대통령께 올렸다. 통일이 눈앞에 있었다.
당시 중대장이던 이대용 장군은 월남전이 종식되던 때 주월 한국대사관을 마지막으로 탈출하다가 월맹군에 포로가 되어 갖은 회유와 협박을 받았으나 끝내 대한민국 군인의 지조를 지키다가 귀환하였다. 이대용 장군은 군인정신의 귀감으로 육사동창회로부터 ‘자랑스러운 육사인’으로 선정되었다.
10월 26일 일렬로 진격하던 6사단 2연대가 중공군 2개 사단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았다. 이것이 중공군의 팔자전법(八字戰法)으로, 도로 양쪽의 산악에 매복하고 있다가 적을 팔자 안으로 유인한 다음 양쪽 날개를 오므리면서 일부 병력은 후방으로 우회 침투시켜 퇴로를 차단, 집중공격을 가하는 전술이었다. 쉽게 이야기하여, 항일전쟁사에 길이 빛나는 청산리 대첩의 재판이라고 할 만하며 왜 수군을 괴멸시킨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鶴翼陣) 바로 그것이었다. 이 공격은 바로 인접 연대로 이어져서 6사단 전체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고, 이 패배는 곧 이어 인접 8사단으로 이어졌다. 10월 29일 현재 2군단의 6개 연대 가운데 4개 연대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적은 중공군 40군이었으며, 이 부대는 희천(熙川)으로 우회하여 청천강 계곡으로 남하한 38군과 합류하여 8군의 우익인 국군 2군단의 정면을 향하여 쇄도하였다. 2군단은 8사단을 청천강 북안(北岸)에, 남안(南岸)에 7사단을 배치하고 6사단은 예비로서 군우리(軍隅里)에 집결하여 재편성, 중공군 공세에 대비한 방어선을 구축하게 하였다. 바야흐로 새로운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게 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한반도와 중국, 특히 만주는 이른바 순망치한의 관계라는 지정학적 인식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10월 2일 주은래가 파키스탄 대사를 통하여 미국에 한국군 단독의 진격이라면 문제시하지 않겠다고 한 것과도 맥을 같이 한다. 임진왜란에 명(明)이 조선에 출병한 것도 조선을 돕기 위해가 아니라 일본군의 진공을 조선에서 막겠다는 의도가 더 컸다. 근세에 청일전쟁과 중일전쟁을 통하여 한반도가 외부세력에 들어가게 되면 그 위협이 바로 만주로, 그리고 본토로 다가온다는 것을 뼈저리게 당해온 중국이었기 때문에 유엔군-미군이 만주의 코앞에 온다는 것은 감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닥치게 될 통일 정국의 전개에서 필히 명심해야 된다.
이승만 대통령이 평양에서 대대적인 개선 행사를 열고 있던 것이 10월 27일이었다. 바로 이때 전방에서는 파국(catastrophe)이 다가오고 있었다. 종말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