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35) ‘지평리 전투’, 릿지웨이의 진면목

신정공세(新正攻勢) 이후 남진을 계속, 1월 초 수원-이천-원주-평창-강릉을 연하는 선까지 남하한 중공군은 유엔 공군의 폭격으로 기동이 제한되고 보급마저 원활하지 못하자, 일단 이 선에서 남진을 멈추고 새로운 공세를 준비하였다.

1월 25일 리지웨이 장군은 서부전선의 1군단 및 중부전선의 9군단에 수원-과천 축선으로 하여 한강을 목표로 한 진격을 명령하였다. 정면의 적은 중공군 38군 및 50군의 2개 군이었다. 평택-안성선에서 공격을 개시한 1군단은 1월 30일 수원-김량장선으로 진출하였고, 2월 4일 안양-판교리선을 점령, 확보하였다. 9군단은 이천-경안리 축선으로 진격하여 북한강 남안의 양수리까지 진출하였다.

미8군이 서부 및 중부전선에서 반격을 시도하고 있을 때, 중공군은 2월 11일, 중동부 전선의홍천-횡성 간의 삼마치 고개 및 지평리 일대에 39군, 40군과 66군을 집결하여 공세를 개시하였다. 2월 13일 밤 중공군 39군 예하 3개 사단이 미 23연대와 프랑스 대대가 사주방어를 펴고 있는 지평리(砥平里)에 대하여 포위공격을 시작하였다. 지평리는 9군단과 10군단을 연결하는 지점으로서 중·동부전선의 요충이었다. 연대장은 지평리 주위의 낮은 고지군을 이용하여 직경 1마일의 사주방어진지를 편성, 대비하고 있었는데, 동·서·북의 3정면에서 포위해오는 중공군 대병력을 맞아 일단 여주로의 철수계획을 수립하였고 사단장과 군단장도 이에 동의하였으나 릿지웨이 장군은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지평리는 적에게 결코 내어줄 수 없는 요충지로서 그곳에서 적과 맞서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것이 릿지웨이의 엄명이었다. 릿지웨이는 지평리를 잘 선정된 전투장으로 보고 이곳에서 중공군을 최대 흡수하여 유엔군의 막강한 화력으로 중공군을 도륙(屠戮)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오냐. 잘 걸려 들었다’는 것이 릿지웨이의 회심의 타산(打算)이었다.

13일 밤, 3개 사단의 중공군은 사방으로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다. 유엔군은 필사적으로 전투에 임하였다. 릿지웨이는 공군기가 네이팜탄으로 적을 강타하고 헬기를 동원하여 탄약과 보급품을 보급하였다. 전투가 절정에 달한 결정적 시기에 릿지웨이는 제5기병연대를 2개 전차중대, 2개 포병대대로 증강, 특수임무부대로 투입하여 23연대의 구원에 성공하였다. 중공군은 마침내 퇴각하였다. 미군진지 주위에 쌓인 중공군 시체만 해도 2000여구에 달했다.???

지평리 전투는 유엔군이 중공군의 대규모 공격에 물러서지 않고 진지를 고수한 최초의 전투였다. 이를 계기로 유엔군은 중공군에 대하여 자신을 갖기 시작하였다. 지평리 전투는 전형적인 사주방어전투로 철저한 화력전투 준비와 보병의 필사의 투지로 중공군의 대병력을 끌어들여 막대한 희생을 치르도록 강요하고 승리한 것으로, 후일 주월한국군이 두코 전투와 짜빈둥 전투에서 성공한 중대전술기지의 확대판이기도 하였다.?

지평리 전투는 또한 프랑스 군의 용명을 드러낸 대표적인 전투로 꼽힌다. 대대장 몽클라르는 2차 대전 중의 전공으로 프랑스의 각종 무공훈장을 받은 군인으로서 당시 이미 중장이었으나 한국에 파견될 대대를 지휘하기 위하여 자진하여 중령 계급으로 참전한 ‘군인 중의 군인’이었다.?

지평리 전투는 이 모두를 종합한 용장(勇將) 릿지웨이의 진면목이 발휘된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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