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21) 美 ‘무조건항복’ 요구, 6·25전쟁 장기화 초래

낙동강 전선의 8군은 1950년 9월 16일 일제히 반격을 개시하였다. 주공인 미1군단(1기병사단, 24사단, 5연대전투단, 국군 1사단 및 영연방 27여단)은 9월 20일 낙동강을 건너 쾌속의 진격을 계속해 9월 26일 오산에서 7사단과 연결하는데 성공하였다. 미9군단(2사단, 25사단)은 9월 25일

진주를 탈환하고, 9월 30일에는 군산-논산으로 진출하였다. 중부전선의 국군 2군단은 9월 28일 충주-원주로, 동부전선의 국군 1군단은 동해안을 따라 9월 30일에 38도선 남쪽까지 진출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의 경이로운 성공에 의하여 조성된 군사적 상황은 미국으로 하여금 유엔군의 38도선 돌파와 북한으로의 진격을 적극 추진케 하는 동기를 제공하였고 유엔의 다수 국가들도 이러한 미국의 움직임에 호의적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9월 27일 미 합참은 맥아더 장군에게 북진계획을 승인하는 훈령을 하달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가지 제한과 전제가 있었다.

10월 1일 유엔군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 김일성에 대한 항복권고 방송을 통해 북한군의 무장해제, 적대행위 중지, 유엔군 포로와 비전투원 억류자 석방을 요구하였다. 사실상 ‘무조건 항복’(unconditional surrender)을 요구한 것이다. 이는 2차대전에서 미국이 독일과 일본에 요구했던 ‘무조건 항복’에 의한 전쟁종결 방식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

‘무조건 항복‘ 요구는 미군의 전통적인 전쟁종결 방식이었다. 미국의 저명한 전사 연구가 Weigley는 미국이 전통적으로 추구해온 전쟁을 war of annihilation(섬멸전)으로 정의하고 이에 대해 war of attrition(소모전)은 미국에 익숙하지 않은 전쟁으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미구(未久)에 지리한 소모전에 시달리게 된다. 그것은 목표와 수단에 제한을 둔 제한전쟁(limited war)이었고, 1차대전과 같은 참호전이었으며, 정치전과 지연전(attracted war)에 능한 공산측을 상대로 하는 협상전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군사령관의 명령이 없는 상황에서 38선을 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통수권자로서 명령하니 따르라”며 북진명령을 내렸다. 정일권 총장은 1군단장 김백일 장군에게 방법을 강구하도록 하였다. 김백일 장군은 38선 북방의 고지 하나를 꼭 점령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필요를 제기하는 방법으로 유엔군사령부의 양해를 얻어 10월 1일 3사단이 38선을 돌파하였다. 이승만의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맥아더도 심정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상태여서 이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정부는 국군이 38도선을 돌파한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했다.

10월 2일 김일성은 맥아더의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항복권고에 대한 북한의 응답이 없자 10월 7일 유엔총회는 통한결의안(統韓決義案)을 통과시켰다. 대한민국에 의한 한반도 통일을 지지한 이 결의안은 국군과 유엔군에 대한 북진 허가장이 되었다. 10월 9일 맥아더는 김일성에게 다시 한 차례 항복 권고를 했다.

여기에 대한 회답이 없자 맥아더 장군은 당일 북진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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