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인천상륙작전 ‘맥아더신화’, 한달 만에 막내린 이유?
승패는 오로지 장수에 달려 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전략구상이 아니었다. 김일성은 이미 8월 28일 박훈일을 인천방어사령관으로, 9월 11일에는 최광을 서울방어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이를 민족보위상 최용건이 서해안방어사령관으로 총괄 지휘하게 하였다. 맥아더가 탁월한 것은 김일성이 낙동강 전선의 전력을 인천과 서울로 전환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꿰뚫어보고 이 간극(間隙)을 부쉈다는 데 있다. 맥아더는 워커의 8군이 낙동강 전선을 지탱해내리라 믿었고 워커는 ‘Stand or Die’의 분전과 절묘한 예비전력 운용으로 이 기대에 부응했다. ‘태평양의 시저’ 맥아더는 태평양전쟁에서 그의 개구리 점프(Frog jump) 전략개념을 성공적으로 뒷받침한 해군과 해병대를 절대적으로 신뢰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맥아더는 ‘Eisenhower’s lieutenant’ 브레들리를 비롯한 합동참모회의에서 5000대 1의 도박이라던 인천상륙작전을 감행, 멋지게 성공한 것이다.
전장에서 상관과 부하는 완벽한 신뢰관계로 뭉쳐져야 한다. 부하는 상관의 판단력과 의지를, 상관은 부하의 투지와 충성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그린 영화 <The longest day>를 보면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에 대비하고 있는 독일군 사령부에 룬트슈테트 원수가 신임 사령관으로 부임해오자 예하 지휘관과 참모들은 개전 초 아르덴느 돌파로 마지노선을 양단, 연합군을 공황상태로 빠뜨려 프랑스군은 항복하고 영국군은 던케르크로 철수한 기적이 다시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것을 본다. 이처럼 전장에서 유능한 지휘관은 수개 사단, 또는 수십개 사단의 전력에 맞먹는 것이다. 물론 룬트슈테트의 성공은 참모장 만슈타인, 16군단장 구데리안, 7사단장 롬멜과 같은 맹장과 함께 이룬 것이었다. 이들은 빛나는 성단(星團)을 이루었고 이 팀의 중심이 룬트슈테트였다는 것이 중요하다.
맥아더의 인천상륙 성공에도 불구하고 부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김책을 독전하던 김일성은 9월 23일 마침내 낙동강 기본전선의 총퇴각(總退却)을 명하였다. 부대의 건제를 제대로 유지하고 퇴각한 것은 4사단장 이건무와 6사단장 방호산 둘뿐이었다. 둘 다 연안파였다. 역전(歷戰)의 용사는 이런 때 빛나는 법이다. 김일성은 이 와중에도 최현으로 하여금 중부 산악지대에 잔류하여 제2전선을 형성하도록 하였다. 북한군 제2전선의 실체를 모르고 종대로 진격하기만 재촉하던 맥아더의 지상전 운용은 엄청난 재앙을 몰고 오게 된다.
원산만에 부설된 기뢰로 상륙 지연
9월 23일 북한군의 궤란(潰亂)을 좇아 낙동강 전선을 돌파한 8군은 서울과 평양을 목표로 경주하기 바빴다. 인천상륙작전의 주역 10군단은 8군과는 역(逆)으로 경부가도를 남하하여 부산에서 승선, 10월 7일 원산상륙을 준비하였으나 원산만에 부설된 기뢰제거를 위한 소해작업 때문에 유병상태(遊兵狀態)에 있다가 10월 26일에야 원산에 행정상륙(行政上陸) 하였다. 10월 1일 38선을 돌파한 한국군 1군단이 10월 10일 이미 원산에 진입하였기 때문이다.
극동군사령부 참모장과 10군단장을 겸한 알몬드의 동부전선과 8군의 서부전선을 동경의 맥아더가 직접 분리 지휘한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납득할 수 없는 조치였으나 이미 ‘신(神)이 된’ 맥아더에게 합동참보본부(JCS, Joint Chiefs of Staff)를 비롯하여 누구도 항의나 조언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이로써 8군과 10군단 사이에는 광대한 공간이 생기게 되었다. 북한군 제2전선과 압록강을 넘은 중공군이 이 공간을 파고 들었다. 결과는 유엔군의 총퇴각이었다. 맥아더 신화의 종막(終幕)이었다. 트루만은 해임이란 방법으로 맥아더를 불러들였다. 후임에는 맹장 릿지웨이가 기용되었다. 릿지웨이는 강철같은 의지력과 수범(垂範)으로 수하를 용왕매진(勇往邁進)케 하여 사태를 수습하였다. 승패(勝敗)는 오로지 장수(將帥)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