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전우애

한미동맹의 바탕은 군사동맹이다. 미국통 국제정치학자나 언론인들은 동북아에서 미국의 ‘핀치 펜’은 일본이며 한국에서 미국은 언제고 빠져나갈 수 있다고들 한다. 과연 그럴까? 동맹의 가치와 무게를 생생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폭격기나 항모보다도 군사연습이다. 한미연합사에서 이루어지는 군사연습을 통하여 한국군은 미국의 세계적 군사체제에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한국 공군기에 급하게 수리부속이 필요하다면 저 멀리 노르웨이의 미군기지에 있는 부속장비도 공수해서 쓸 수 있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에서 소요의 물자와 장비를 조달할 수 있는 나라는 지구상에 미국 말고는 없다. 이것이 한미동맹의 실체다.

외교통이라고 알려진 바이든 부통령이 최근 방한하여 “한국은 베팅을 잘하라”고 하였는데 메시지가 분명한 것은 좋지만 이는 지극히 비외교적인 언사이다. 한국과 미국의 군인들은 이런 표현을 쓰지 않는다. 대신 “같이 갑시다(Let’s go together)”라는 말로 우의를 다진다. 바이든의 표현이 좀 어눌하기는 하지만 미국인의 한국에 대한 생각의 민낯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크게 반성하고 범국가적으로 개선책을 강구해야 한다.

도대체 미국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들은 우선 지난 정권의 ‘동북아 전략적 균형자’ 운운에 큰 배신감을 느꼈다. 본래 균형자라는 개념은 유럽에서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서 영국이 취했던 역할에서부터 출발했다. 일본과 중국,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이 balancer 역할을 취할 수 있는가? 이것은 국제정치의 ABC도 모르는, 소도 웃을 이야기다. 고래와 코끼리의 줄다리기를 시켜 놓고 북을 치고 있는 토끼의 역할을 한국이 하겠다는 건가? 그것은 우화에나 나오는 이야기지 현실세계에서 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한국에 가까웠던 미국인일수록 “한국이 미국에 대해서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격분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장가간 아들을 ‘우리 며느리의 남편’이라고 부르는 어버이와 같은 심정이라고 할 것이다.

한중관계를 ‘전략적협력동반자’ 관계라고 하는데 우리는 이것과 한미동맹과의 차이를 정확하고 엄밀하게 알아야 한다. 비유를 하자면, 미국과 한국과 미국의 동맹은 미우나고우나 떨어질 수 없는 혈연과 같다. 반면에 한국과 중국의 우호관계는 언제고 바꿔 입을 수 있는 의복과 같다. 한국과 미국은 피를 나눈 혈맹에서 이념과 가치를 같이 하는 가치동맹으로 나아가고 있다. 중국도 장차 이 방향으로 나가면 우리와 가까워질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작년에 한중 무역고가 한미 무역고와 한일 무역고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 그러나 중국이 미국이나 한국과 가치체계를 달리 하는 한, 중국은 아직은 우호를 같이 할 나라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성립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절대적이지만 1953년 5월 미국방문에서 이를 처음으로 제기한 백선엽 장군의 공도 작지 않다. 미국이 한국을 동맹으로 받아들인 것은 같이 싸운 한국군 장성들에게 큰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워커, 리지웨이, 밴플리트 등 용장들은 당시 50대 중반이었다. 백선엽, 김종오, 장도영 등은 30대 초반이었으나 총명하고 성실하게 배웠고 충성스럽게 싸웠다. 미군 장성들이 보기에 한국 장성들은 신뢰가 갔다. 미국 군부에 쌓인 이런 감동이 한국과 동맹을 맺을만하다는 신뢰의 바탕을 이룬 것이다.

한미동맹의 근저에 있는 전우애를 회복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게 동맹을 다지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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