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법과 원칙의 관철···대처와 카터의 경우

북아일랜드 문제는 영국 정부와 국민이 오랫동안 시달려온 문제였다. 북아일랜드 문제의 복잡성은 그 지역이 아일랜드의 일부이면서 주민의 다수는 영국계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영국 정부로서는 북아일랜드를 포기하자니 영국계 주민들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비난을 받게 되고 북아일랜드를 유지하자니 아일랜드계의 끊임없는 테러로 국력소모를 계속해야 되는 진퇴양난의 처지에 처해 있었다. 12세기 아일랜드가 잉글란드에 병합된 이래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지방에서 많은 주민이 아일랜드로 이주하였는데 이들의 대부분이 북아일랜드에 거주하여 왔으며 아일랜드계에 비해 3대1의 다수를 점하고 있었다.

아일랜드계와 영국계는 그들 주장을 관철하기 위하여 서로 극렬하게 대립하였는데 특히 아일랜드계는 IRA를 조직하여 영국본토에까지 무자비한 테러를 자행하였다. 1970-80년대를 통하여 이들은 ‘전쟁’이라고 부를 정도의 대결을 하고 있었고 이 소용돌이 가운데 여왕의 사촌인 마운트바텐 공이 IRA 테러에 의해 폭살되고 대처 자신도 테러를 모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대처가 북아일랜드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내세운 원칙은 “주민의 의사, 다수의 의사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과, 법과 질서는 어떤 경우에도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테러분자에 대해서는 어떠한 양보도, 관용도 베풀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밀고 나갔다. 1985년 교도소에 수감된 테러리스트들이 대우 개선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벌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의 요구는 죄수복 대신에 자기들이 원하는 옷을 입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는데 대처는 이러한 요구가 대우개선에 관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교도소의 권리를 당국으로부터 빼앗으려는 음모로 보아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단식기간 중 수많은 항의 시위가 잇달았고 정치인, 종교인, 아일랜드 정부로부터 양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대처는 결코 원칙을 굽히지 않았다. 급기야 단식으로 10여명이 죽었는데도 여기에 동요되지 않고 법과 원칙을 관철한 대처의 용기와 책임감은 무서운 것이었다. 대처가 통치하는 영국에서 막무가내식 떼법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 것이다.

이란이 미국 대사관원을 억류하였을 때 카터가 취한 우유부단하고 미숙한 조치들, 특히 이들을 구출하려는 작전이 참담한 실패로 끝나 미국의 위신이 땅바닥에 떨어졌을 때 대처는 영국은 이런 실수를 해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을 새롭게 하였다. 대처는 카터를 스스로의 지도력보다는 워터게이트 사건의 반사에 힘입어 대통령이 된 사람으로 보았으며 대전략에는 취약하면서 세세한 것에 고심하는 것은 적합지 않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런던에서 일단의 이란인들이 이란대사관에 난입하여 인질을 잡고 이란 정부에 정치범 석방 등의 요구를 내걸었을 때 대처는 이들이 비록 호메이니에 반대하는 친서방적인 이란인들이기는 하나, 영국 영토에서 테러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을 취하였다. 결국 특공대원을 투입하여 인질을 구출하고 테러리스트들을 사살하여 사건을 종결시켰는데 여기서 보인 대처의 과단성과 능숙한 사건처리는 카터와 대조를 이루어 대내외에 강한 인상을 주었다.

법과 원칙의 관철은 역사의 법정에 홀로 선 용기만이 이를 가능케 하는 지고의 책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