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인도네시아도 있다!
인도네시아는 대국이다. 190만 평방키로의 넓이는 160만의 위구르와 36만의 독일을 아우를 만하며 동서길이는 미국 대륙과 비슷하다. 인구는 2억5천만으로 중국, 인도, 미국에 이어 세계 제4위다. 아랍이 아니라 인도네시아가 세계 최대의 이슬람국가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인도네시아는 기본적으로 동남아 국가다. 한국, 중국, 일본은 동북아와 동남아를 한데 묶어 동아시아로 보는 데 익숙하지만 동북아와 동남아는 다르다. 일본인들이 한국과 일본은 동문동종(同文同種)이라고 하여 한자를 같이 쓰는 것과 민족적 접근성을 강조하지만, 동남아에서 베트남을 제외하고는 한자를 썼던 나라는 없다. 동아시아는 하나가 아니다.
1965년 9월 30일 인도네시아에서 공산당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났다. 비동맹의 맹주를 자처하며 중공과 유대를 유지하면서 공산당을 허용한 수카르노가 화를 키운 것이다. 전략군사령관이던 수하르토가 이를 진압하였다. 쿠데타에 중공이 개입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군 장성이 다수 희생된 군부는 대대적인 공산당 제거에 나섰다. 30만의 공산당원이 살해되었는데 거의가 중국인들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중국인은 절멸(絶滅)되다시피 했다. 동남아에서 화교는 상권을 쥐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주로 상업으로 재산만 축적할 뿐 국가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들은 불안하면 언제라도 미국 캐나다로 이주할 준비를 해놓고 있다.
1978년 등소평이 개혁·개방을 하자 불안했던 동남아의 화교자본이 대거 중국으로 몰려 들어왔다. 박정희가 경제건설의 종자돈을 주로 대일청구권, 월남파병에 의존하였다고 하면 등소평은 안전하게 민족자본에 의존할 수 있었다. 이를 조직화한 것이 싱가포르의 이광요였다. 항상 불안하던 화교들은 중국이라는 막강한 배경을 얻었다. 오늘날 중국의 동남아 전략은 화교를 앞세운 대중화권(大中華圈)의 건설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현지인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 1965년 중국인을 절멸시킨 인도네시아의 화교 배척 운동은 태국 등에서 언제라도 다시 나타날 수 있다.
한국전쟁으로 신무(神武) 이래의 경기를 맞은 일본의 상품은 1960년대 동남아를 휩쓸었다. 드골이 이케다 수상을 트랜지스터 상인이라고 조롱하던 시기다. 남이야 무어라하건 싸고 좋은 일본 상품은 세계를 휩쓸었다. ABCD 봉쇄에 돌파하려 대동아전쟁을 일으켰던 일본은 석유, 주석, 고무 등 인도네시아의 무궁무진한 자원에 광희(狂喜)했다. 인니 점령군 16군 사령관 이마무라(今村)의 군정이 필리핀, 버마와 달랐다는 것은 정도의 차이이지 일본의 민낯은 네덜란드를 이은 침략세력이라는 것을 인도네시아인들은 분명히 보았다. 그들은 일본의 상품공세를 경계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한국이 인도네시아에 진출하기 시작한다. 보르네오의 목재가 출발이었다. 한국이 중국상인과 일본상품 사이에서 공정한 중간역할을 할 수 있겠다는 것이 인도네시아 엘리트들의 기대였다. 특히 군부는 한국의 방산물자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식민지 지배를 겪어본 그들은 미국은 물론, 영국 불란서 화란 등에 친밀감을 갖기 어려웠다. 더구나 이들의 정밀 고가무기는 별 소요가 없었다. 한국은 이 틈새에 파고 들 수 있다.
한국은 대동아전쟁을 일으킨 일본과 대중화권 건설을 꿈꾸는 중국 사이에서 동남아에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절묘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한국은 17세기에 네덜란드가 불란서와 독일, 영국 사이에서 구사하였던 영리한 국가전략을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구사할 수 있다.
문제는 지도자다. 국민들도 깨어야 한다. 미일중러가 세계의 전부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