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퍼시발과 ‘마레노 도라’

9일 아베 신조 일본총리가 콜린 바넷 서호주 총리와 악수를 하고 있다. 아베는 양국간 대외문제에 대한 회담을 나누기 위해 뉴질랜드, 호주와 파푸아 뉴기니를 방문중이다. <사진=AP>

태평양전쟁은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되었지만 이와 동시에 감행된 일본군의 동남아-필리핀, 말레이, 인도네시아, 버마-침공에 대해서는 군인들도 별로 주목하지 않는다. 일본군은 남방총군을 편성하고 4개 군(2~3개 사단의 군단)을 투입하였다. 말레이시아에 야마시다(山下)의 25군, 인도네시아에 이마무라(今村)의 16군, 버마에 무다구찌(牟多口)의 15군, 필리핀에 本間의 14군이었다.

필리핀 전역이 개시되던 첫날 미육군 항공대는 경계부족으로 통타(痛打) 당했다. 맥아더는 통수권자 루즈벨트의 명령에 따라 치욕을 무릅쓰고 “I shall return”이라는 말을 남기고 필리핀을 탈출한다. 맥아더의 독특한 모자는 미군의 제식모(制式帽)가 아니라 케손 대통령이 선물한 모자이다.

말레이 반도는 정글이 우거져 있어 대부대가 공략하기에 제한이 많았다. 영국군은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공략할 것으로 예상하여 대대적인 요새화를 시켜놓고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야마시타는 말레이반도를 은륜(銀輪, 자전거)부대로 종주(縱走)하여 싱가포르 요새의 후방에 들이닥쳤다. 영국군은 기습을 당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포탄 보급은 제한되어 있었다. 마지막 일제사격을 퍼붓고 재보급을 기다리고 있는 중에 일본군은 눈을 의심했다. 퍼시발이 백기를 들고 나타난 것이다. 다 같이 어려운 상황에서 영국군의 정신력이 일본군을 당하지 못한 것이다.

항복하러 온 퍼시발이 조건을 협상하러 꾸물대자 야마시타는 단숨에 “예스냐? 노냐?”고 일갈(一喝)했다. 질린 퍼시발은 “예스”로 답했다. 이 통쾌한 일갈로 야마시타는 마레노 도라(말레이의 호랑이)로 알려지게 되었다. 산토스 섬에 가면 이 장면이 생생히 재현된다. 물론 마지막은 영국군의 개선이지만, 한 영국군 장교는 싱가포르의 실함(失陷)을 가리켜 “Asia after Singapore will never be the same”이라고 역사적 의미를 내렸다. 동남아에서 서구 식민제국은 종막을 내린 것이다. 일본이 대동아공영권 운운하는 것은 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아베 일본 총리가 파푸아 뉴기니아를 방문하여 위령탑에 헌화하고 감격해 한다. 기시 노부스케의 재현이다. 거침없던 일본군의 진공은 호주 침공을 위한 과달카날 공략에서 멈추었다. 미드웨이 해전 등 미 해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서태평양에서 일본은 제해권을 상실했다. 일본군의 진격은 완전히 돈좌(頓挫)된다. 이 당시의 고전(苦戰)은 당시 대본영에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현지의 허위보고와 통신두절 때문이었다. 고립된 일본군은 하나둘 아사하면서도 끝까지 저항한다.

야마시타는 일본이 항복한 후 전범으로 잡혀 사형을 당한다. 포로로 잡힌 영 연방군에게 ‘죽음의 행진’을 강요하였다는 구실이었다. 그보다도 구미인(歐美人)에게 굴욕을 안겨준 것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영친왕 이은(李垠)과 더불어 조선인 중 최고위에 있었고 육군대학을 나온 준재로 이름 높았던 홍사익도 이때 사형당한다.

반면 인도네시아를 점령하고 통치했던 이마무라 히도시(今村 均)에 대해서 연합군은 전범으로서 가혹한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의 군정은 비교적 가혹하지 않았다고 한다.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는 오히려 네덜란드 공략으로 인도네시아 독립의 계기를 만든 일본에 우호적이었다.

국제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가 우려를 자아내고 있는 소이(所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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